유중교는 1886년(고종 23) 심설의 대의(大意)를 밝히고자 「조보화서선생심설(調補華西先生心說)」을 지어 김평묵(金平默)에게 질정(質正)을 청하였고, 1888년에 ‘화서선생심설정안’이라는 제명(題名)으로 계속 증정(證正)을 청하였다. 1891년 김평묵의 임종 직전에야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이 글로 인해 이항로 문인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야기되었다. 유중교는 1893년 자신의 임종이 임박하자 이 글이 본체(本體)나 도리에 맞지 않는다며 문인 유인석(柳麟錫) 등을 시켜 회수하도록 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태극의 주재(主宰)가 있음과 명덕주리(明德主理)의 기본 견해는 이항로의 심성론과 같으나, 다만 심은 먼저 형이하의 입장에서 물(物)로 지목해야 후폐(後弊)가 없다는 것이 다르다. 심은 이(理)와 기(氣)를 합한 것이지만, 그 신명지각(神明知覺)은 마음의 순수한 본성을 다할 때도 있고, 또한 잃을 때도 있으므로, 이가 주장이 될 때는 이로써 주를 삼는 것이 합당하지만, 심 전체를 형이상으로만 보아 이로 단정함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심의 본위(本位)는 신명(神明)으로서 진망사정(眞妄邪正)을 겸하고 있는 당체(當體)인 바, 말의 순서상 마땅히 형이하로 말하고, 이 당체 중에서 진정한 것만을 가려서 본체라 하고 형이상이라 한다면 후학의 의심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만약 심을 이라고 말한다면 비록 가리키는 근본이 순수함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뒤에 배우는 사람이 한 두 번 전하는 사이에 혹 당체까지도 이로 생각될 것이 염려되어 조보하게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