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솟을대문의 상량대 묵서명(墨書銘)에 1887년(고종 24) 문을 세웠다고 하였고, 안채는 이 문보다 약 50여 년 전에 세웠다고 하므로 대략 19세기 초엽에 창건된 집으로 추정된다.
이 집은 안산(案山)이 노적가리를 닮은 산이어서 누대로 재록(財祿)을 누릴 수 있는 명당터에 자리 잡았다고 전해진다. 집 뒤의 배산(背山)은 나부죽한 동산이다.
마을에서 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뒷동산이 연이은 산세를 좇아 꼬불거린다. 산기슭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솟을대문에 당도하는데 대문은 북북서향을 하였다.
대문에서 보면 집은 한쪽만 보여 큰 것 같지 않지만 실제로는 50칸이 넘는 대가이다. 안채 · 사랑채 · 바깥채 · 안행랑채와 대문간채까지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일견 작게 보이는 것은 집을 앉힌 좌향의 묘미에 있다. 서쪽의 동산은 좌우로 길게 퍼졌다.
집은 그 기슭에서 동동북향으로 앉았다. 즉, 기슭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으니 북쪽 대문에서 보면 장방형의 좁은 쪽만 보이게 마련이다. 이는 난세를 견디어내는 하나의 지혜였다고 할 수 있고, 이 점에서 이 집이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대문을 들어서면 반듯한 마당이 나오고, 서쪽에는 사랑채가 동향하여 있다. 앞퇴가 있는 칸반통의 4칸 규모인데 방이 2칸이고 나머지가 마루이다. 사랑채 맞은편, 마당 끝으로 대문간채에 이어지는 바깥행랑채가 있다.
단칸통의 5칸이다. 사랑채와 안채와의 사이에 곳간채가 있다. 외줄박이의 4칸 규모이다. 이 곳간의 문은 안채로 향하고 있어서 사랑채에서는 뒷벽만이 보인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복도가 있다. 곳간채에 가려서 바깥사람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한 통로가 열린 셈이다. 이 구조도 다른 데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집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안채는 칸반통의 3칸 대청이 중심에 자리잡고 방은 그 왼편에 있다. 직절(直折)하면서 동편으로 3칸의 안방과 안방 남쪽의 뒷방이 전부이다. 안방에는 뒤퇴가 있고 뒷방 앞에는 쪽마루가 있다. 안방의 동쪽으로 큼직한 부엌이 있다.
안마당은 장방형인데 그 끝에 안행랑채 7칸이 있다. 행랑채에는 중문 한 칸이 있다. 측간 등의 부속건물이 있지만 이들이 배치된 윤곽은 통칭 월(月)자형이라 부르는 길상형(吉祥形)이다. 명당에 좋은 집을 지었다는 평판을 들었다고 주인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