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직지(直之), 호는 오촌(梧村). 풍저창수 황준원(黃浚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친부전부 황탕경(黃湯卿)이고, 아버지는 영춘현감 황수(黃琇)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이준(李浚)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했고, 1602년(선조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에 분속되었다가 이듬해 검열이 된 뒤 1604년 주서·대교·설서를 거쳐 사과에 올랐다.
이후 부수찬·정언·헌납·병조정랑·수찬·교리·사서를 역임하고, 암행어사가 되어 관동지방의 수재민 진휼에 힘썼다. 광해군 때에 선천군수를 지내고 1611년(광해군 3)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615년 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를 거쳐 1621년 분병조참판(分兵曹參判)이 되고, 오위도총부총관이 되었으나 대북파의 전횡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파주목사가 되어 난으로 피폐해진 전민(田民)의 복구에 노력하고, 김해·원주의 목사를 거쳐, 1630년 창원 부사로 재직 중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