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전라남도 보성에서 목사 보익(保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부인 김계화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1934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園)에서 수학하였고, 1940년 동북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법문학부를 졸업하였으며,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대학원에서 잠시 연구하였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컬럼비아대학교와 1942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42년 미국 사법성과 전시정보국에 근무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미군정 시기에 귀국하여 관계에 투신하여 1946년 미군정청 법무부 고문관을 지냈다.
1948년 제2회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해 대한민국 외무부 초대 정보국장 겸 법무부 법무관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 변호사로 개업을 하였다.
1950년 2대 때에는 용산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4년 3대 때에는 용산 을구에서 자유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9년 4대 때에는 전남 보성에서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당선되었다. 1950년부터 1956년까지 국회 외무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56년에는 민의원 부의장이 되고, 유엔총회 한국대표를 지냈다.
1959년 6월부터 8월까지 전라남도 지사를 역임하고, 1960년 5대 때에는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참의원 의원을 역임한 뒤, 정계에서는 멀어지고 법조계와 학계에서 활약하였다. 1964년 명지대학교 정경학부 교수로 숭실대학교 · 총회신학교 · 단국대학교 등에서 조직신학 · 변증학 · 기독교 윤리학 등의 강사를 겸임하였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법학원 원장을 지냈고, 1970년 에는 기독교실업인회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중에는 평신도로서 기독청년동지회를 조직하였다.
그 뒤 전국기독청년면려회의 지도자로 청년신앙운동을 추진하였다. 1969년 9월 우석대학교에서 <한미행정협정연구-종교와 정치, 미국헌법의 정치철학적 배경->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정치는 주로 이승만(李承晩) 정권하의 여당인 자유당에서 하였고, 그 뒤 학계에서 활동하다가 1971년 잠시 민주공화당 전남 제11지구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1978년 11월부터 1981년 2월까지 서울제일교회에서 담임목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 충현장로교회 원로목사에 선임되어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옛 세계관과 새 세계관, 황성수 논설집≫ (문화춘추사, 1954), ≪황성수논설집≫(신조, 1955), ≪교회와 국가≫(信望愛, 197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