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전라북도 민속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생가이다. 이재(頤齋)의 선친이 건립하였으며, 지금은 안채 · 사랑채 · 곳간채 · 문간채만 남아 있다.
높이 80cm의 잡석기단 위에 세워진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초가집으로서 그 규모가 매우 큰 건물이다. 서쪽부터 간살의 구성을 보면 부엌 · 안방 · 대청 · 건넌방 순으로 방이 이어져 규모는 크지만 전형적인 남부지방의 평면구성을 따르고 있다. 다만 안방과 부엌 사이에 있는 반칸 크기의 작은 쪽방이 특이하다. 이집에서는 재방이라고 하나 정지방의 준말인 듯하다. 이 방에는 안방과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있으며 마루에서도 직접 출입할 수 있다. 대개 마루에서 부엌으로 쪽문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집은 이 방을 통하여 부엌과 안방이 연결된다. 또한 2칸의 대청 북쪽 툇칸에 짜놓은 붙박이 뒤주도 이 집의 큰 특징이다.
뒤주 상부 뒷벽에는 벽감을 만들어서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당초에는 사당이 안채 뒷편에 별도로 있었다고 한다. 벽체는 문을 제외하고 모두 판벽으로 마감하였으며 밑에는 머름청판으로 격식을 갖추었다. 전면의 두리기둥 및 부재의 넉넉함과 치목수법을 볼 때에도 충분히 기와집으로 지을 수 있었지만 기와를 덮으면 혈(穴)이 눌려서 집안이 좋지 않다는 믿음 때문에 초가로 한 것이다.
사랑채와 문간채, 곳간채는 소실되었던 것을 1909년에 다시 지었다. 곳간채는 5칸 규모로서 매우 큰 편이며, 바닥에는 모두 마루를 깔아 알곡을 그대로 갈무리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가옥 내에는 『이재난고(頤齋亂藁)』 등 문집 50책이 1984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