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5의사 중의 한 명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봉일(鳳一), 호는 만취(晩翠). 충청남도 보령출신.
1878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선전관에 임명되어 관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1881년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들여온 것이 발단이 되어 전국이 척사 상소로 비등할 때, 영남유생 이만손(李晩孫)의 만인소(萬人疏)에 이어 충청도 대표로 홍시중(洪時中)과 함께 척사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조선책략』을 불태울 것을 비롯한 시무책을 주청하였으나, 도리어 전라도 지도(智島) 유배에 처하여졌다. 귀양에서 풀려나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유회군(儒會軍)을 모아 동학군을 진압하였으며, 1895년 을미사변 후 홍주을미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