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아버지는 공조판서 황형(黃衡)이다.
강원도사 때 1514년(중종 9) 10월 좌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천거해 갑산부사, 경상좌도·전라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1520년에는 정조사로 중국을 다녀왔다. 이후 충청도수사·회령부사·함경북도병마절도사·강계부사 등의 외관직을 두루 거쳤다.
1526년에는 북도 병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을 수개월 지체한 일로 파직되었다. 1530년(중종 25) 서소위장(西所衛將)으로 있으면서 한성부좌윤을 겸하였다. 이에 위장이 직소를 비우고 부에 출사하는 곤란한 점이 발생하자, 이를 시정해 직소와 본사와의 거리가 먼 경우에는 동서반 정직에 있는 자가 위장을 겸임하는 일을 개정하도록 하였다. 한성부우윤을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을 지냈다.
1532년 6월에 함경북도절도사에 임명되자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 체직(遞職: 관직이 교체됨.)을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모친의 간절한 상언으로 체직되었다. 이듬해 3월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7월에 다시 북도병마직에 일등으로 추천되었다.
이 같은 일은 그의 부친이 북방의 절도사로 있으면서 오랑캐들에게 위엄을 떨쳐 ‘황정승’이라 일컬어졌으며, 그들이 항시 “나는 황정승을 못보았으니 그의 아들이라도 한 번 보기를 원한다.”고 하니, 그 위복이 충분히 그들을 진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무인적 자질이 뛰어나 변방의 방비책이나 군사문제가 발생하면 반드시 주장하는 위치에 있었다. 1535년부터는 다시 경직을 맡아 한성부우윤을 거쳐 무인으로서 2품직인 공조판서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지중추부사, 한성부판윤, 좌변포도대장, 비변사당상 등을 차례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