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아버지는 현감 황득중(黃得中)이다. 1644년(인조 22)심기권(沈器遠)의 역모를 고변한 공으로 1등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이후 고변한 자가 수훈을 차지하는 것은 공론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2등으로 감해져 효충분위병기영국공신(效忠奮威炳幾寧國功臣)으로 회흥군(檜興君)에 봉해지고 자급은 가의대부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득중도 가선대부에 승진되었다.
경상좌병사·어영대장을 거쳐 병조참의·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51년(효종 2) 12월에 일어난 김자점(金自點)의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무죄임이 드러나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후 다시 복직되어 평안병사, 통제사 등을 역임하였다.
1654년에는 병영의 무명베를 환전하여 착복하고 장인(匠人)들로 하여금 만들게 한 배나 각종의 물건들을 자기의 재산으로 귀납시키는 등의 장오죄(臟汚罪)를 범하였으니, 공신으로서 사형에서 한 등이 감해져 수 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석방된 뒤인 1664년(현종 5)에 친공신으로서의 예우를 하기 위해 다시금 직첩(職牒: 관직 임명사령장)을 돌려주도록 하였다. 그리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용하라는 명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결국 환수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