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청송부사를 역임한 회곡 권춘란(權春蘭)이 살던 집으로 전해 온다. 그는 아들이 없어 동생 춘계(春桂)의 큰아들을 입양했는데, 그 까닭에서인지 춘계공이 이 집을 지었다고 「판서공별업유사(判書公別業遺事)」에 언급되어 있다.
일월산(日月山) 기슭에 서남향한 터를 잡고 반변천(半邊川)을 내려다보는 배산임수의 형국을 갖추었다. 창건 당시엔 주변에 아무 집도 없었다 하는데 지금은 10여 채가 있고, 골목 안에 고택에서 옮겨 온 권춘란의 묘우(廟宇)가 있다. 원래 고택 앞마당엔 연못과 대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다 없어졌다.
안채는 {{#060}}자형이며 아주 질박한 구조다. 재목을 다듬는 기법에서도 도끼별(원목을 산판에서 도끼로 제재한 것)의 흔적이 보여 아주 고식(古式)임을 알 수 있어 임진왜란 이전에 창건되었다는 설과 부합된다.
중문간 좌측에 마구간, 이어 부엌이 되면서 서쪽 날개가 시작되는데 부엌 2칸에 이어 바로 안방 2칸이다. 그리고는 1칸의 윗방이 되면서 우측으로 3칸 대청이 계속되고 다음에 건넌방, 그리고 꺾이면서 고방 쪽문이 있고 다시 1칸 방 그리고 사랑방이다. 사랑방엔 앞쪽으로 쪽마루가 설치되었다. 이런 평면 구성도 매우 고졸한 편이다.
대청은 삼량(三樑)집인데 구조 기법을 여실히 보여 준다. 도끼별 집이면서 격식을 갖추느라 애썼는데 이는 집주인의 신분이 고려되었던 듯 싶다. 대청 뒷벽 바라지창에 중간 설주가 있다. 이것도 고식을 알리는 하나의 증거이다.
사당은 경내 밖으로 옮기며 다시 지었던지 ‘上之十四年戊牛…’에 입주 상량했다고 기명(記銘)하였다. 영조 14년(1738)에 준공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 내부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선물로 받은 감실(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을 비롯해 『회곡선생문집』, 장곡(藏谷)선생 유서통(諭書筒)과 교지(敎旨), 옥관연(玉冠硯) · 옥관자 · 관인(官印) · 호패(號牌) · 공신록○행장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