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87장). 사본. 편자 및 연대는 미상이다. 송시열의 거주지가 회덕(懷德)이고, 윤증의 거주지가 이성(尼城)이기 때문에 ‘회니본말’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송시열과 윤증은 사제관계였다. 1673년(현종 14) 윤증이 아버지 선거(宣擧)의 묘갈문을 송시열에게 청하면서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과 윤선거가 생전에 송시열을 충고하기 위하여 써놓은 서간(己酉擬書)을 보여 주었다.
서간을 받아본 송시열은 크게 불만을 느껴 야유하는 뜻의 묘갈문을 지어 보냈다. 윤증은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묘갈의 개찬을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약간의 자구만 수정하였을 뿐 골자는 끝내 개찬하지 않았다.
1680년(숙종 6) 남인의 처벌문제로 서인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자 윤증은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상의 결함을 지적한 서간(辛酉擬書)을 지었다. 동생 윤추(尹推)와 교우인 박세채가 만류하여 공개되지 않았으나, 송시열의 손자 주석(疇錫)이 절취해 전달함으로써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에 송시열은 크게 노해 사제(師弟)의 의를 끊어 버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시 집권당인 서인 내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었다. 윤증은 온건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강경파인 송시열측의 노론과 치열한 당쟁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책에는 1681년부터 1685년 간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왕복한 서간문·상소문·연중설화(筵中說話) 및 유생들의 통문(通文) 등 45건의 문건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발단이 된 <윤증의상우재서 尹拯擬上尤齋書>(辛酉擬書라고도 함.), 박세채의 물음에 답한 <윤증답현석서 尹拯答玄石書>, 윤증이 나양좌(羅良佐)의 물음에 답한 <윤증답나양좌서 尹拯答羅良佐書>, 송시열의 제자인 최신(崔愼)이 윤증을 비난한 <직장최신상소 直長崔愼上疏>, 박세채가 윤증을 비호한 <현석소 玄石疏>, 민정중(閔鼎重)·김수항(金壽恒)이 어전에서 송시열·윤증의 불화를 논란한 <연중설화>, 송시열·윤증 간에 왕복한 8통의 서간문, 윤증이 아버지 선거가 강화(江華)에서 죽지 않고 산 것을 이이(李珥)가 소시에 입산(入山)하여 중이 된 사실에 비겨 불의가 아니라고 인용한 <윤증송실록청서 尹拯送實錄廳書>, 유생들이 윤선거를 이이에 비유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규탄한 <옥천통문 沃川通文>·<사학통문 四學通文>·<저태학사학통문 抵太學四學通文>, 사학유생들의 통문을 반박한 <예문관통문 藝文館通文>, 박세채가 사국당상(史局堂上) 이단하(李端夏)에게 보낸 윤선거가 강화에서 죽지 않고 산 것을 변무한 <현석여이공단하서 玄石與李公端夏書>, 윤선거가 강화에서 죽지 않고 산 사실을 중심으로 송시열을 옹호하고 윤증을 성토한 <유학이진안소 幼學李震顔疏>, 이 상소를 반박하고 윤증을 변호한 <정원계 政院啓>, 김수항·최석정(崔錫鼎)이 어전에서 위의 상소 등을 중심으로 송시열·윤증의 문제를 논란한 <연중설화>, 사관발론(史館發論) 때 윤증을 옹호한 사람들을 파직할 것을 청한 <거행조건 擧行條件> 등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