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왕정(王侹). 개성왕씨(開城王氏)로 아버지는 영인후 왕진(寧仁侯 王稹)이며, 어머니는 명종의 딸인 연희궁주(延禧宮主)이다. 신종의 딸 경녕궁주(敬寧宮主)와 혼인하고 회안공에 봉하여졌다.
1231년(고종 18) 몽고가 구주를 공격하므로 박서(朴犀)가 포차(砲車)를 쏘아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 때 몽고의 장수 살리타[撒禮塔]가 지의심(池義深)·강우창(姜遇昌) 편에 회안공의 편지를 구주에 보내 항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자 1232년에 몽고군사가 돌아가므로, 김취려(金就礪)와 함께 몽고 군사를 위로하며 전송하였다. 최춘명(崔椿命)이 자주부사(慈州副使)로서 자주(慈州: 지금의 평안남도 順川)를 굳게 지키자 살리타의 요구로 후군진주(後軍陣主) 대집성(大集成)을 보내어 “국조(國朝)와 삼군(三軍)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속히 나와 항복하라.” 하였으나 최춘명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1324년(충숙왕 11)경 반룡사(盤龍寺)에서 향여(向如)가 주법(主法)으로 추천되자 회안공의 경애가 깊었던 것으로 보아 불교에도 관심이 컸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