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악기 편성법과 음악에 차이가 있다. 중궁고취(中宮鼓吹)에는 후부고취가 없다. 『악학궤범』에 의하여 성종시대의 후부고취의 편성법을 소개하면 (그림 1)과 같다.
고려 때는 임금의 수레 뒤에는 대개 취라군(吹螺軍)이 따랐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위와 같은 후부고취가 있었는가 하면, 선조 이후로는 많은 변천이 있었다.
1701년(숙종 27)의 통신사행렬도에는 행렬 뒤의 악대를 세악수(細樂手)라 하여 해금·장구·적·피리로 편성되었고, 영조 초의『종묘개수도감의궤』의 후부고취는 당비파·피리·해금·장구·적·피리·당비파 순의 횡대 2열로 되어 있었으며, 1763년(영조 39)『계미수사록(癸未隨槎錄)』에는 세악수라 하여 악공(樂工) 6인으로 되어 있다.
1926년 김석태(金錫泰)의 「조선열성조능행도」에 보이는 어전 세악수의 악기 편성은 (그림 2)와 같다. 이와 같이 고취악은 시대에 따라 서로 달랐으며, 타악기 위주가 아니고 피리·적 등 가락악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