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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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폭의 피륙을 이어 만든 둘러치는 장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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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여러 폭의 피륙을 이어 만든 둘러치는 장막.
내용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휘장을 설치한 거대한 규모의 집이 그려져 있는데, 그 그림에 따르면 실로 수백명을 수용할 크기로 보인다. 이러한 주거양식은 몽고의 파오와 흡사하여 우리 민족이 유목생활을 하는 북방민족과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불려(拂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집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서(唐書)』에 의하면 당나라 조정에서 큰 잔치를 베풀 때 정전의 앞뜰에 막을 설치하고 불려정이라 불렀는데 이 불려의 설치는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654년에는 토번(吐蕃)에서 불려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토번은 서역과 고구려에 이어지는 문화교류의 통로상에 있었던 한 지역으로, 이 지역에서 당나라에 불려를 보낸 시기는 고구려 말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휘장은 불려가 당나라에 수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제작, 사용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에는 전포(氈布)로 방장(房帳 : 휘장의 일종)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휘장의 설치는 고구려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신라·백제·통일신라 때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654년 이후 부자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되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의 문화가 중원에 전파된 한 모습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휘장을 치는 풍속은 우리 민족이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주거양식이 벽체를 설치하는 양식으로 바뀜에 따라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휘장은 조선시대 종묘정전에서 위패를 모신 각 방을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되거나, 외기(外氣)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문에 치는 방장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의 살림집』(신영훈, 열화당, 1983)
집필자
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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