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창(昭陽江倉)·가흥창(可興倉)과 함께 좌수참(左水站)에 소속되어 인근 고을의 세곡(稅穀)을 운송하였다. 좌수참에는 51척의 참선(站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의 흥원창(興元倉)을 계승하여 운영하였다. 원주·평창·영월·정선·횡성 등 강원도 영서지방 남부 5개 고을의 세곡과 강릉·삼척·울진·평해 등 영동지방 남부 4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일정한 기일 안에 경창(京倉 : 서울에 있는 조창)으로 운송하였다.
그 뒤 1413년(태종 13) 영동지방의 세곡을 주창(主倉 : 그 지역의 세곡을 모두 한 곳으로 모으는 조창)에 남겨두고 군사용의 물자로 사용하게 하면서 영서지방의 세곡만 운송하였다. 그 운송항로는 한강의 수로를 따라 서울의 용산강변에 이르는 것이었다.
소양강창과 마찬가지로 그 기능이 크지 않아서 조선 후기에 관선조운(官船漕運)이 쇠퇴하고 사선업자(私船業者)에 의한 임운(賃運 : 운임을 받고 운반하던 제도)이 널리 행하여지면서 관할 각 고을의 세곡도 임운됨으로써 이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