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천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희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희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남동부에 있는 군.
정의
평안북도 남동부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강계군, 서쪽은 운산군·영변군, 남쪽은 평안남도 덕천군·영원군, 북쪽은 초산군·강계군과 접한다.

동경 125°59′∼126°50′, 북위 39°59′∼40°29′에 위치하며, 면적 2,365.9㎢, 인구 7만 2196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8개 면 35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희천읍 읍상동이다.

자연환경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남서부의 하천 유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에는 묘향산맥(妙香山脈)이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낭림산(狼林山, 2,014m)·묘향산(1,909m)·무동봉(舞童峰, 1,762m) 등이 솟아 있으며, 북쪽에는 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이 남서쪽으로 뻗어 적유령(963m)·구현령(狗峴嶺, 815m)·극성령(棘城嶺, 654m) 등이 솟았고, 이들의 여맥이 각 방면에서 군내로 뻗었다.

청천강이 적유령에서 발원하여 희천강(熙川江)·백산천(白山川)·진면천(眞面川) 등 여러 지류를 합치면서 군의 중앙을 남서류하며, 이들 하천 유역에는 좁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남서부에 형성된 희천분지는 비교적 넓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여 이 군의 주요 생산 지대가 되고 있다.

내륙에 위치하여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의 특색을 나타내며, 연평균 기온 7.8℃, 1월 평균 기온 -12.0℃, 8월 평균 기온 24.4℃, 연 강수량 1,226㎜이다. 서리는 10월 초순경에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 하순경에 끝난다.

역사

[고 대]

선사 시대의 유물·유적이 아직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청동기 시대까지도 이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인접한 강계군 공귀동·풍룡동 및 영변군 세죽리에서 청동기 유물과 주거지가 발견되었고, 군내 청상리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의 유적 및 명도전(明刀錢)이 출토되어 적어도 청동기 시대에는 사람이 정착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중국의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 하나인 연(燕)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희천군뿐 아니라 주변의 철산군·창성군·영변군·박천군·위원군·강계군··자성군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은 연나라 소왕연간(昭王年間, 서기전 312∼서기전 279)에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요동 지방의 만번한(滿潘汗)에 진출한 사실과 관련시켜 보면, 이 지역에까지 연나라의 상인이 들어와 상거래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과 한사군을 거쳐 고구려의 세력이 차차 강성해짐에 따라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어 군현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발해 시대에는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하여 있었다.

[고 려]

발해가 멸망한 뒤 압록강 이남의 평안북도 서부 일대에는 여진족이 흩어져 살고 있다가 정종 때 청천강을 넘어 덕창진(德昌鎭)과 박주(博州)에 성을 쌓고, 이어서 광종 때 위화진(威化鎭)·무주(撫州)·안삭진(安朔鎭)·영삭진(寧朔鎭)·태주(泰州)·운주(雲州)·안융진(安戎鎭) 등지에 여러 성을 쌓으면서 고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979년(경종 4)에는 청새진(淸塞鎭)에 또 성을 쌓았는데, 이 진이 지금의 희천이다.

그 뒤 1027년(현종 18) 청새진에 성 820칸을 쌓아 문 7개소, 수구(水口) 4개소, 성두(城頭) 15개소, 차성(遮城) 4개소를 두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은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여 대대적인 수축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새진의 주현군은 중랑장 1명, 낭장 3명, 별장 7명, 교위 15명, 대정 31명을 비롯하여, 행군(行軍) 830명, 정용(精勇) 12대(隊), 내마(內馬) 2대, 좌군(左軍) 10대, 내노(內弩) 1대, 우군(右軍) 3대, 보창(保昌) 5대, 신기(神騎) 33명, 보반(步班) 10명, 백정(白丁) 56대 등이 두어져 있었다.

또, 거란에 대비하여 1033년(덕종 2)에 기공, 1044년(정종 10)에 완성한 천리장성은 압록강구로부터 청새진을 거쳐 함경도 정평에 이르는 장성이었다.

1217년(고종 4) 거란(契丹) 금산(金山)·금시(金始) 두 왕자가 몽고에 쫓겨 9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침공해 왔을 때 후군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조양진(朝陽鎭 : 지금의 개천)을 근거로 북진하여 청새진에서 이를 크게 무찔렀다.

이로 인하여 청새진은 위주(威州)로 승격되고 방어사(防禦使)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 뒤 오랑캐에 항복하여 나라를 배반함으로써 희주(熙州)로 개칭되고 개주(价州)의 겸관(兼官)으로 강등되었다.

[조 선]

1396년(태조 5)개주에서 분리되어 희주군으로 독립하였다가 1413년(태종 13) 10월 군현 명칭의 주(州)를 모두 산(山) 또는 천(川)으로 고치는 규례에 따라 희천군으로 개칭되었다. 관원으로는 군수와 훈도 각 1명이 두어져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 현재 호수 319호, 인구 1,060명이었으며, 삭주도호부에 속하여 군수는 강계도좌익병마(江界道左翼兵馬)를 겸하고 군정(軍丁)은 익군(翼軍)이 232명으로 고려 시대보다 적었다.

한편, 1456년(세조 2) 3월 희천이 적유령을 끼고 있는 요충지라 하여 진을 설치하였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영변진관(寧邊鎭管)에 속하여 관원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1명을 두고 군수가 이를 겸하였다.

1498년(연산군 4) 김굉필(金宏弼)이 무오사화로 이곳에 유배되었을 때 뒤에 사림파의 거두가 된 조광조(趙光祖)가 찾아와서 수학한 것은 유명하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에는 동면·북면·서면·서동면·남면·진면·장동면·유원면(柔院面) 등 8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호수 6,293호, 인구 2만 1756명이었다.

[근 대]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5월 지방관제를 개혁하여 종래의 8도 군현제를 부군제, 즉 23부 337군으로 개편하자, 희천군으로서 강계부에 속하였다. 그러나 부군제는 불합리한 점이 많았으므로 1896년 8월에 다시 전국을 13도(道)·1목(牧)·8부·331군으로 개편하면서 평안북도 희천군으로 개편되었다.

1907년 5월 현재의 행정구역은 동면·서면·남면·북면·장동면·동창면·신신풍면·신흥면(新興面)·진면·서동면·읍내면(邑內面) 등 11개 면으로 이루어져 호수 6,342호, 인구 2만 6665명이었다.

이곳은 본래 험준한 산악이 많은 오지에 속해 있어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 후 일제의 만주 경영을 위한 군사적 목적과 평안북도 내륙의 방대한 천연자원 개발을 위한 다목적 노선으로서 평안남도 순천에서 만포에 이르는 만포선(滿浦線)이 1939년 2월에 완공되어 희천을 통과함으로써 강계와 더불어 평안북도 오지의 자원과 관광 개발의 중심지가 되었다.

1941년에 읍내면이 희천읍으로 승격되었고, 1943년 5월 현재 호수 1만 2851호, 인구 7만 3612명으로 대폭 증가를 보이고 있다.

3·1운동 때 희천군에서는 종교 단체가 미약하고 학생 조직이 활발하지 못하여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지 못하였으나, 몇 사람이 준비 공작을 벌이다가 실패한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즉, 이 군 출신의 김봉훈(金鳳壎)이 남만주독립단의 특파원으로 희천에 잠입하여 임종형(林鍾衡)·황기룡(黃起龍) 등과 거사를 준비하다가 연락원이 일본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김봉훈 등 주모자가 모두 붙잡히고 거사가 좌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의 독립 운동을 보면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가 실시되면서 1920년 9월 양찬구(梁燦龜)가 군감(郡監)으로 임명되었고, 김봉훈은 3·1운동 후 두 번 이나 검거되어 평양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또한, 무장 독립단의 활동도 활발하여,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경찰관계연표(朝鮮總督府警務局高等警察關係年表)에 따르면 1920년 2월 22일부터 1926년 10월 3일까지 약 6년8개월 동안 1921년 2회, 1922년 7회, 1923년 3회, 1924년 1회, 1925년 6회, 1926년 1회 등 도합 20회에 걸쳐 무장 독립단의 활동이 있었다.

이 고장 출신의 독립 운동가로는 김용재(金用才)와 나창헌(羅昌憲)이 있다. 김용재는 일찍이 간도에서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였고, 국내에 들어와 단양·영월·영주 등지에서 독립 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28년 상해로 망명하기 위하여 여비를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쫓겨 산중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나창헌은 1910년 8·29경술국치 후 독립 운동에 투신하여 청년외교단원 및 대동단원으로 활약하다 붙잡혀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2년 상해에 망명하여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이사 등의 요직을 지냈으며, 1925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임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탄핵안을 제안하고 내무부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유물·유적

성지로는 서면 극성동·평원동, 북면 명대동·명문동, 동창면 아롱성동·석포동·창동, 신풍면 남동·서동으로 이어지다가 영변군으로 넘어가는 1㎞에 달하는 장성이 4개 면, 9개 동을 통과하고 있는데, 이 장성은 높이 2.72m, 너비 7.3m나 되는 석성(石城)이다. 이 장성 외에도 신풍면 동동에 속칭 노양성(老陽城)이라는 석성지가 있고, 장동면 생동에 봉단성지(鳳丹城址)가 있다.

그리고 희천읍내에는 고려 현종 때 축성하였다는 토성지(土城址)가 남아 있는데, 이 읍성을 일명 ‘진서성(鎭西城)’이라고도 하며, 기록에는 성내에 삼지칠천(三池七泉)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불교 문화재로는 남면 원명동에 원명사(圓明寺)가 있어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의 영정이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진면 장평동에서 남쪽으로 12㎞ 되는 곳에는 두타사(頭陀寺)가 있고, 신풍면 동동의 용림산(龍林山)과 적유산(狄踰山) 중간에 보현사(普賢寺)가 있으며, 이곳에는 사리탑과 칠층석탑이 있다. 또한, 북면의 두첩산(頭疊山)에는 휴정이 수도하였다는 두첩사(頭疊寺)가 있다.

그 밖에 누정으로는 희천읍의 월파정(月波亭)·우농정(寓農亭)·만화당(萬和堂)·초연정(超然亭) 등이 있고, 희천읍의 청산 중턱에는 희천향교가 있는데, 목조건물로서 중앙의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東廡)·서무(西廡)와 명륜당(明倫堂)을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향교이다.

교육·문화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는 희천향교와 많은 서당이 있었으며, 이 밖에 1576년(선조 9)에 세워진 상현서원(象賢書院)이 있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4년 길헌태(吉憲泰)가 유신학교(維新學校)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에 힘쓰다 경술국치 후 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으며, 1910년 희천읍에 4년제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고, 1917년 신풍면에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그 뒤 1면1교 정책에 따라 점차 학교 수가 증가하였으며, 교통이 불편한 산간지대에는 간이학교가 세워져 교사 한 사람이 3학년까지의 교과과정을 가르쳤다.

또한, 예로부터 명주의 산지로 유명하여 희천읍 읍상동에 여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희천여자기업보습학교(熙川女子機業補習學校)가 있었으며, 이는 1945년에 희천공립농업학교로 개편되었고, 그 뒤 희천중학교가 되었다.

종교 상황은 묘향산의 보현사가 가까이 있고, 두첩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들이 있어 신도들이 많다. 천도교는 1900년에 포덕(布德)되어 1945년에는 청우당(靑友黨)을 조직할 만큼 세력이 커졌다.

기독교는 1908년에 김의진(金義珍)·김현진(金賢珍)·궁현섭(弓顯燮) 등이 중심이 되어 희천읍에 감리교인 희천교회를 세웠으며, 그 뒤 신풍면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유교·불교의 세력이 커서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산업·교통

산지가 많고 평야가 적어 밭농사를 주로 하며, 조·콩·수수·옥수수·대마·감자 등이 많이 생산되고, 축우·양돈·양잠도 행하여진다. 특히, 양잠은 비교적 성황을 이루어 가내기직(家內機織)이 많이 보급되어 명주 산출이 많으며, 면포(綿布)·마포(麻布) 등도 생산된다.

산지에는 각종 수목이 무성하여 양질의 목재가 산출되고 있다. 광산물은 흑연·무연탄 등이 매장되어 있으나 가동은 부진한 상태이다.

상업 활동은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1830년대 군내에 관전장(館前場)과 하장(下場)이 있어 관전장은 7·17·27일에, 하장은 2·12·22일에 월 3회씩 열렸으며, 쌀·콩·밀·보리·깨·개석잠풀(水蘇)·포목·솜·생선·소금·놋그릇·철물·나무그릇·옹기·사기그릇·꿀·담배·삿자리 등이 거래되었다 한다.

그 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902년경에는 읍내장(邑內場)·장동장(長洞場)·유원장(柔院場)이 서로 날을 달리하여 5일장으로 열렸다 한다.

1926년에는 시장이 늘어 희천읍내장이 2·7일에 열렸으며, 장동면 관동의 관동장이 1·6일에, 서면 극성동의 서창장(西倉場)이 3·8일에, 신풍면 서동의 신풍장과 북면 명문동의 명문장이 4·9일에, 동창면 창동의 창동장이 5·10일에 각각 열렸으며, 농산물·수산물·포목·가축·일용 잡화 등이 거래되었다. 그 뒤 1930년대에 만포선이 개통되면서 평안북도 남동부의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이들 시장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교통은 만포선이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황경참·부성·희천·초산·명문·개고 등의 역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희천읍을 중심으로 1등도로와 2등도로가 사방으로 나 있어, 동쪽은 갑령(甲嶺)을 넘어 함경남도 장진 방면, 서쪽은 운산·북진 방면, 남쪽은 오령(五嶺)을 넘어 평안남도 영원 방면, 북쪽은 적유령·구현령을 넘어 강계 방면, 극성령을 넘어 초산 방면으로 각각 통한다.

읍·면

[희천읍 熙川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85.12㎢, 인구 1만 4625명(1944년 현재). 읍 소재지는 읍상동이다.

면의 북부에 가지봉(柯枝峰, 640m), 남부에 묵봉산(墨峰山, 637m) 등이 솟아 있으며, 청천강 상류의 4대 지류인 백산천·영문천(靈門川)·가라지강(加羅之江)·평원천(平院川) 등이 중앙에서 합류하여 남서류한다. 이들 하천 유역에는 군내에서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벼농사와 밭농사가 함께 행하여지며, 축산업도 활발하다. 또한, 명주·꿀·인삼을 비롯하여 당귀·산사자·대황·현삼·작약·오미자 등 약초 재배도 행하여진다. 청천강에는 잠종개·황쏘가리·새미·열목어 등이 서식하고 있다.

교통은 만포선이 중앙을 지나며 희천역이 있고, 강계와 영변으로 통하는 도로와 초산과 영원으로 통하는 도로가 중앙에서 교차하고 있어 매우 편리하다.

유물·유적으로는 가라지강변에 우농정과 월파정이 있고, 읍하동에 만화당이 있으며, 진서성지가 있다. 읍상(邑上)·읍하(邑下)·역평(驛坪)·가라지(加羅之) 등 4개 동이 있다.

[남면南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90.02㎢, 인구 5,15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소요항동이다. 묘향산맥이 남서쪽으로 뻗어 내리는 북사면에 해당하여 동부와 남부는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묘향산을 비롯하여 비로봉(毘盧峰, 1,909m)·부용봉(芙蓉峰, 1,432m)·묵봉산·대추령(大楸嶺, 650m)·자영덕봉(紫永德峰, 419m) 등이 동부와 남부의 경계를 이루며 연이어 있고, 청천강이 중앙을 남서류하면서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쌀을 비롯하여 옥수수·콩·조·밀 등이 생산되며, 인삼 등 약초 재배도 행하여진다. 교통은 만포선이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지나며 부성역이 있고, 영변∼강계 간 도로가 이와 병행하여 지나고 있어 편리하다.

유물·유적으로는 원명동에 원명사가 있으며, 소요항동 암굴에 지은 절이 있다. 소요항(所要項)·원명(圓明)·부성(富城)·송곶지(宋串之) 등 4개 동이 있다.

[명동면東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48.89㎢, 인구 5,255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갈현동이다.

북쪽에는 적유령산맥이, 남쪽에는 묘향산맥이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있는 사이에 위치한 산간분지로 곳곳에 높은 산들이 산재하여 있다.

동단에는 온곡산(溫谷山, 983m)·대암봉(大巖峰, 975m), 북쪽에 각봉(角峰, 820m)이 솟아 있으며, 청천강의 두 지류가 산지 사이를 흐르고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며, 산지에는 박달나무·참나무·가문비나무 등이 많아 목재가 생산되며, 꿀·산삼과 산사자·당귀·오미자·생지황 등 약초 재배도 행하여진다. 계곡의 물에는 잠종개·황쏘가리·새미·열목어 등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광업은 금·은·동·흑연 등이 산출된다.

교통은 만포선이 면의 서부를 남북으로 지나며 초산역이 있고, 영변∼강계 간 도로가 이와 병행하여 있으며, 희천읍과장진으로 통하는 도로가 남부를 동서로 지나고 있어 편리하다. 갈현(葛峴)·청량(淸凉)·어허천(魚許川) 등 3개 동이 있다.

[동창면東倉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27.67㎢, 인구 6,79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창동이다. 적유령산맥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여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북고남저의 지형을 형성하고 있으며, 남쪽을 제외하고는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북쪽에는 백산(白山, 1,875m)을 중심으로 맥초덕산(麥草德山, 1,578m)·증봉(甑峰, 1,258m)·두첩산(1,472m)·장대산(將坮山, 1,182m)·적유령·초막령(草幕嶺, 903m)·각봉 및 거문산(巨門山, 1,175m) 등 높고 험한 산들이 솟아 있다. 백산천이 중앙을 남류하고, 아롱천(我弄川)이 서부를 남류하여 청천강에 합류한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며, 조·콩·옥수수·밀 등이 생산되고 인삼도 재배된다. 삼림이 무성하여 박달나무·참나무·가문비나무 등의 목재가 산출되며, 산삼·꿀·당귀·산사자 등도 산출된다. 산세가 험하고 물이 맑아 계곡에서는 열목어·잠종개·황쏘가리·새미 등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광업은 중석·흑연이 많이 산출된다.

교통은 희천읍과 강계로 통하는 도로가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창(倉)·신죽(新竹)·백산(白山)·석포(石浦)·아롱성(我弄城) 등 5개 동이 있다.

[북면北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69.45㎢, 인구 7,927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명문동이다. 적유령산맥의 남사면에 위치하여 산세가 험하며, 특히 북쪽은 1,000m 이상의 높은 준령들이 솟아 있어 북고남저의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면의 경계를 따라서 대암산(大巖山, 1,566m)·무쌍봉(武雙峰, 1,241m)·향래봉(香來峰, 1,534m)·광장봉(廣丈峰, 1,383m)·각대봉(角臺峰, 1,164m)·호항령(弧項嶺, 565m)·가지봉·각봉·두첩산·구현령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가라지강과 희천강이 서부와 동부를 남류하며,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하곡저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하천 유역인 평지에서 벼농사가 행하여지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밭농사가 행하여진다. 산에는 박달나무·참나무·가문비나무가 많아 임업이 활발하며, 산삼 채취와 당귀·대황·현삼·작약·오미자·산사자 등 약초 재배도 행하여진다.

광업은 금·은·동·흑연·운모 등이 산출되며, 특히 관대동의 운모광산은 유명하다. 교통은 만포선이 면의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며 개고·명문역이 있고, 영변과 강계로 통하는 도로가 이와 병행하여 있어 편리하다.

유물·유적으로는 두첩산에 옛날 휴정이 수도하였다는 두첩사가 있으며, 명대동에 은선암(隱仙庵)이 있다. 명문(明文)·관대(館垈)·명대(明垈)·개고개(价古介) 등 4개 동이 있다.

[서면西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27.10㎢, 인구 5,636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극성동이다.

호항령·우모령(牛帽嶺, 536m)·백석산(白石山, 486m)·가지봉 등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으며, 중앙에 북산(北山, 825m)이 솟아 있다. 평원천을 비롯한 청천강의 지류들이 산지 사이를 남서류하며, 유역에 좁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하천 유역의 평지에서 소규모의 벼농사가 행하여지며, 밭농사로는 주로 콩·조·옥수수 등이 생산된다. 또한, 소 사육이 성하며, 당귀·대황·생지황·현삼·작약 등 약초 재배도 행하여진다. 산에는 박달나무·참나무·가문비나무 등이 많아 임업이 활발하여 목재 생산이 많다. 광업은 금·은·동·흑연·중석 등이 산출된다.

교통은 초산과 영원으로 통하는 도로가 중동부를 지나고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극성(克城)·평원(平院)·상서(上西) 등 3개 동이 있다.

[신풍면新豊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3.85㎢, 인구 1만 2944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서동이다. 사방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산간분지로서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낭림산맥의 주봉인 낭림산을 비롯하여 웅어수산(雄魚秀山, 2,019m)·흑동령(黑洞嶺, 1,502m)·매막령(1,358m)·면막령(棉幕嶺, 1,318m)·석립산(石立山, 1,773m)·응동령(鷹洞嶺, 1,253m)·갑현령(甲峴嶺, 1,009m)·맥초덕산·천상대(天上臺, 1,478m)·함지동령(咸之洞嶺, 1,230m) 및 연재덕봉(囦在德峰, 1,519m) 등이 연이어 둘려 있고, 중앙에도 파명산(破明山, 1,056m)·증봉·아미산(蛾眉山, 1,481m) 등 높은 산들이 산재하여 있다. 감입곡류인 청천강이 산지를 좁고 길게 흐르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고 콩·조·피·옥수수·수수 등이 생산되며, 산에서는 산삼 등 약초 재배도 행하여진다. 또한, 산에서는 가문비나무·박달나무·참나무 등이 많아 임업도 활발하여 목재 반출이 많고, 계곡에는 물이 맑아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광업은 금·은·동·유화철·흑연 등이 산출된다. 교통은 희천읍과 장진으로 통하는 도로가 북서부를 지나고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유물·유적으로는 서동에 봉황대(鳳凰臺)가 있으며, 동동에 노양성지와 보현사가 있다. 남동에는 남동온천이 있으며, 북동에는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진 약수가 있다. 서(西)·동(東)·남(南)·북(北) 등 4개 동이 있다.

[장동면長洞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290.47㎢, 인구 8,212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관동이다. 묘향산맥이 남동부를 지나고 있어 남동부가 높고 북서부가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면의 동쪽에 대동산(大同山, 1,153m)·천상대·향라봉(香羅峰, 1,724m)·초동령(草洞嶺, 1,342m)·무동봉·온곡산 등이 연이어 솟아 있으며, 중앙에도 연두봉(蓮頭峰, 889m)·호암산(虎巖山, 1,227m) 등이 솟아 있다. 백산천의 지류가 이들 산지 사이를 흐르며, 유역에 좁은 곡저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고, 조·콩·옥수수·밀 등이 생산되며 약초 재배도 행하여진다. 산에는 박달나무·참나무·가문비나무가 많아 임업이 활발하다. 원흥동 계곡의 맑은 물에는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광업은 흑연·중석이 산출된다. 교통은 희천과 장진으로 통하는 도로가 면의 북부를 지나고 있을 뿐이어서 불편하다.

유물·유적으로는 생동에 봉단성지가 있으며, 원흥동에 원흥온천(元興溫泉)이 있다. 관(館)·원흥(元興)·용평(龍坪)·생(生) 등 4개 동이 있다.

[진면眞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262.79㎢, 인구 5,639명(1944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장평동이다.

묘향산맥의 북쪽 사면에 위치하여 산세가 험하며 남고북저의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비로봉·칠성봉(七星峰, 1,894m)·부용봉·인달산(仁達山, 1,694m) 등을 비롯하여 천쾌산(天快山, 1,927m)·온곡산·대암봉 등 비교적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진면천이 면의 중앙을 북류하여 청천강에 합류하고 있다.

주산업은 농업으로 밭농사를 주로 하며, 조·옥수수·콩·밀 등이 생산된다. 산에는 가문비나무가 많아 임업이 활발하며, 양봉과 인삼·약초 재배도 행하여진다. 교통은 초산과 영원으로 통하는 도로가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있어 비교적 편리한 편이다.

유물·유적으로는 옛날 휴정이 수도하였다는 금선대(金仙臺)와 만수암(萬壽庵), 두타사 등이 있다. 장평(長坪)·마선(馬船)·초(草)·행천(杏川) 등 4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본래 평안북도에 속하였으나 1949년 1월 새로 신설된 자강도에 편입되었으며, 1967년 10월에 희천시로 승격되었다. 그 뒤 장동면·동창면·신풍면이 분리, 신설된 동신군에 통합되었고, 북부 일부 지역은 송원군(신설)에 넘겨주었다.→동신군,희천시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경국대전』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희천읍지』
『평안북도지』(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희천군지』(희천군지편찬위원회, 1980)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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