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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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지리
지명
한반도 서쪽에 있는 바다.
이칭
이칭
서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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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한반도 서쪽에 있는 바다.
내용

남쪽은 동중국해와 접하고 서쪽은 중국 대륙의 산둥반도(山東半島), 북쪽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 그리고 동쪽은 우리 나라에 의하여 포위되는 서부 태평양의 북부에 위치한 연해(沿海) 중의 하나이다.

국제수문기구에 의하면 남부 경계는 한국의 제주도에서 중국 상해(上海) 부근 양쯔강(揚子江) 하구까지의 선을 택하여 북쪽은 랴오둥만과 산둥반도를 잇는 선에 의하며, 보하이만(渤海灣)과 구분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하이만까지 합쳐서 황해라 부른다. 크기는 남북 약 1,000㎞, 동서 약 700㎞로 전 해역에 걸쳐 100m 이하의 수심을 가지는 동부아시아의 거대한 대륙붕을 형성하고 있다.

대체로 수심은 20∼80m 정도이며 평균 심도는 44m, 최심도는 103m이다. 비교적 얕은 바다는 한반도에 치우쳐 남북으로 연장되어 있다. 신생대 제4기의 해수면 변동을 고려할 때 최후의 빙하기 때 해수면이 현재보다 100m 이상 낮았으므로 황해는 전체적으로 육지화되었을 것이다. 그 뒤 후빙기(後氷期)에 해수면이 점차 높아져 황해가 다시 생기게 되었다.

황해의 동부 및 서부 해안 지역은 강한 조류에 의하여 분급이 잘된 사질저층(砂質底層)을 형성하고 중앙분지의 저층은 점토(粘土 : 극히 미세한 암석풍화의 분해물)나 세사(細砂 : 가는 모래)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중국 본토 쪽의 저층 퇴적물은 대체로 점토이다. 황하(黃河)에서 유출되는 황색의 점토는 내륙 지방의 황토(loess)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혼탁한 물질 때문에 항상 바닷물이 누렇게 흐려 있어 황해라고 한다. 황해의 서쪽 해안은 고기암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지성의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는 리아스식만을 형성하여 좋은 항구로 이용되고 있다. 황해의 바람은 동해 · 남해와 마찬가지로 계절풍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하여 겨울에는 북서풍 또는 북풍이 탁월하여 풍속이 매우 강하며, 여름에는 남동풍 또는 남서풍이 많이 부는데 풍속은 약한 편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신라인들은 이미 계절풍을 이용하여 황해를 횡단하였다. 태풍은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빈도가 높고, 돌풍현상은 겨울에서 초봄까지 한랭전선 통과시 나타나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해무(海霧)는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섬이나 첨단부 등 한랭한 상승류가 있는 해안에서 현저하다. 특히, 중부 이북의 해저에는 여름에도 5∼6℃의 냉수괴가 남아 있다. 이것은 남해 연안까지 신장하여 안개 발생의 원인이 된다. 황사현상(黃砂現象)은 봄에 빈번히 나타나서 해상교통에 지장을 준다. 표면 수온은 대륙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여름이 25∼27℃, 겨울이 2∼8℃로 연교차가 매우 크다.

한반도의 서해안은 압록강 입구에서 전라남도의 해남갑(海南岬)에 이르는 직선 거리 650㎞로 지절률(肢節率)은 7.26이며 해안선의 길이는 육지부 4,719㎞, 도서 지방 3,700㎞에 이른다. 해안선의 지절률은 매우 높은 편이나, 해저지형과 조차(潮差)의 영향으로 항만 발달 조건에는 불리하다.

조차가 큰 황해는 간석지의 발달이 현저하여 만조시에는 침수되고 간조시에는 해면상에 나타나는 넓은 조간대(潮干帶)가 형성된다. 이와 같은 곳은 염전으로 많이 이용된다. 또한, 우리 나라의 서해안 쪽은 산사면이 완만한 반면 여름에는 압록강 · 대동강 · 한강 · 금강 등에서 많은 토사가 유출되어 하구에 퇴적 간석지를 형성한다.

만입(灣入)을 중심으로 넓은 갯벌을 형성하고 있으며, 특히 해저물질의 퇴적으로 지면이 차차 높아져 육지면이 바다 쪽으로 성장하는 반면 만조시에는 침수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에 따라 해식애와 파식대(波蝕臺)가 육상에까지 노출되어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전라남도 신안의 홍도(紅島)는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해에 면한 우리 나라의 서해안과 중국의 동해안은 저평지가 넓으며 인간생활의 중심지가 되어왔다. 따라서, 황해는 일찍부터 인접한 해안을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구실을 하여왔다. 김상호(金相昊)는 서기 전 3000년대 이전에 잡곡 재배 농업이 중국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전래되었으리라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도해전래(渡海傳來) 가능성의 근거로는, 육로를 통하는 경우 통과하게 되는 황하의 하류 일대는 훨씬 후대인 주나라 때에 비로소 개발되기 시작하였다는 점과, 삼한시대에 한반도의 남부가 북부보다 인구가 많은 사실이 이 농업의 전래 기간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또한, 수전농업(水田農業)의 경우에도 중국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내왕에 해로가 많이 이용되었다. 백제는 수차에 걸쳐 해로로 서진(西晉)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므로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은 660년(의자왕 20) 수군을 이끌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공략하였고, 그 이듬해에 다시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려 시대에도 황해를 통하여 송나라 사신 및 상인의 내왕이 활발하였다. 이때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瀾渡)는 국제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황해는 조차가 커서 얕은 해안의 해협이나 반도의 첨단부에서는 급격한 조류가 나타난다. 이러한 급류는 근대적인 항해 장비와 항해술이 등장하기 전에는 연안 항해에 큰 위협이 되어왔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화물의 운송은 하운(河運)과 해운(海運) 등 수운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화물의 대부분은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양곡이었는데, 이 양곡들은 하천을 통하여 남해와 황해로 나와 한양으로 운송되었다. 따라서, 서해 연안에 급격한 조류가 나타나는 곳은 항해에 큰 문제가 되었다. 연안 항로 가운데 가장 험난한 곳은 황해도의 장산곶, 충청남도 태안반도의 안흥량(安興梁), 인천광역시 강화의 손돌목[孫乭項]등이었다.

그 중에서 양곡의 수송량이 많은 안흥량과 손돌목은 해난 사고의 규모가 크고 빈번하였다. 이에 안흥량과 손돌목의 험난을 피하기 위하여 안흥량운하와 김포굴포를 뚫는 방법이 추진되었다. 안흥량운하(일명 가적운하)는 태안반도 동쪽의 가로림만과 적돌만을 연결하는 운하로서 고려와 조선 시대 때 10여 차례에 걸친 공사를 추진하여 일단 운하의 형태를 갖추기는 하였으나 개통에는 실패하였다.

김포굴포는 인천에서 김포평야를 지나 한강에 이르는 운하로, 고려와 조선 시대에 공사가 추진되었으나 풍수지리상의 문제로 일부 구간을 뚫지 못하게 하여 역시 개통되지 못하였다. 험난한 항로였던 황해도의 장산곶과 태안반도의 안흥량은 각각 경기만의 최북단과 최남단에 위치한다. 따라서, 경기만 연안 사이의 항해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

경기만은 형태상 일종의 지중해 구실을 하여 경기 · 황해 · 충청남도의 해안 지방을 잇는 구실을 하여왔다. 경기만 연안 지역은 해상교통이 중심을 이루는 동안에는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였다. 최근 우리 나라와 중국 사이의 경제적 교류가 확대될 전망을 보이면서 서해안의 개발이 활발하여지고 있다.

대규모의 방조제들이 축조되고 공업단지들이 곳곳에 들어서며 주요 항구들의 시설이 확장되고 있다. 앞으로 황해는 사람과 물자가 활발하게 교류되는 주요 활동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해물(海物)을 위(魏)나라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해물이란 어떤 종류의 수산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서해안은 좋은 어장이었고, 어업 기술도 비교적 발달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백제 말, 법왕은 숭불사상에 연유된 살생금단의 풍조에 의하여 어업을 금지하는 금살령을 내린 적도 있다. 이러한 조처는 비록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백제 어업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자가 탄생하였을 때 여러 가지 보물과 함께 염분(鹽盆)과 어량(魚梁)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고려 시대에 어량의 경제적 가치가 컸고, 어량 어업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어량은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천과 해면에 설치되었고, 조기와 청어를 비롯한 각종 어류 및 새우와 게류가 많이 어획되었다. 조선 전기에 포획한 수산생물은 어류가 약 50종, 패류와 해조류 및 기타 생물이 각각 10여 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어류가 약 100종, 패류와 두족류(頭足類) 30종, 갑각류 40종, 해조류가 10여 종, 기타 생물이 15여 종으로 합계가 200여 종에 달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 수산생물의 종류가 현재처럼 많지 않았지만, 현재와 비슷한 종류가 대략 있었을 것이고, 자원량이 현재보다 훨씬 풍부하였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 사용하였던 어구와 어획하였던 어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전(魚箭)에 속하는 정치망[駐木網 · 設網 등]으로 민어 · 삼치 · 가자미 · 붕장어 · 달강어 등을 어획하였고, 중선(中船)으로는 조기 · 새우 등을 잡았다. 궁선(弓船, 횟배)으로 새우 · 뱅어 · 조기 · 뱀장어 등을 어획하였고, 비교적 적극적인 어구 어법인 망선(網船)으로는 도미 · 삼치 · 청어 · 방어 · 전어 · 민어 · 준치 · 갈치 등을 어획하였다.

자망(刺網)으로는 참조기를 어획한 것으로 되어 있고, 지인망(地引網)으로는 주로 멸치를 잡았다. 1900년경에는 안강망어업(鮟鱇網漁業)을 일본에서 도입하여 개량, 발전시켰다. 그리고 1970년대까지 암해와 수해로 구성된 어구를 사용하였으나 1980년대부터는 국립수산진흥원에서 개발된 전개범포(展開帆布)를 사용하여 보다 효율적인 어구로 개량되었다.

앞으로 어군에 관한 정보는 소나(sonar)로, 선위와 항적에 관한 것은 인공위성으로, 어구에 관한 것은 원격 조정 장치로 보내지는 발신기 신호로 얻게 될 것이다. 이들 세 가지를 조화시키면 바다 속을 환히 들여다보면서 조업하게 될 것이다. 황해는 넓은 대륙붕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조기 · 갈치 · 민어 · 도미 · 고등어 · 새우 등과 같은 어류를 대상으로 하는 저인망 어업이 성행하고 있다.

또한 빠른 조류 때문에 안강망어업도 많이 보급되고 있다. 황해어장에서 주요 어획 대상으로 하는 온대성 어종으로는 조기를 비롯한 민어 · 전갱이 · 멸치 · 광어 · 삼치 · 도미 등이며 한대성 어종으로 대구나 꽁치 등도 있다. 온대성 어종 중에 새우는 특히 황해에서 많이 난다. 황해는 각종의 새우가 풍부하기 때문에 안강망 · 저인망 등에 의하여 다량 어획된다.

대하는 3∼5월에 걸쳐 산란하기 위해서 연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서해안 연안의 수역에서 많이 잡힌다. 이 밖에도 많은 온대성 어종들이 황해에서 산란을 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황해는 해양 생물의 좋은 번식장 구실을 한다. 또한, 넓은 대륙붕의 영향으로 패류들의 훌륭한 서식처가 된다. 그 중에 특히 참조개 · 백합 · 홍합 · 전복 · 키조개 · 피조개 · 바지락 · 가리비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좋은 조건 때문에 연안을 개발하여 패류 양식장이 많이 형성되고 있다. 황해에서의 유용 해조류(海藻類)는 동해나 남해와 같이 그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김양식을 많이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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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망어구개량연구(鮟鱇網魚具改良硏究)」(『국립수산진흥원연구보고서』 27, 1981)
「연안어업자원조사(沿岸漁業資源調査)」(『국립수산진흥사업보고서』 92,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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