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인민회의 ()

정치·법제
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 이전에 북한에서 입법권을 행사한 최고주권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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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북조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 이전에 북한에서 입법권을 행사한 최고주권기관이다. 1947년 2월에 창설되었다. 회의는 3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최고인민회의가 설치되기 이전까지 모두 5차례의 정기회의와 1차례의 특별회의가 열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 이전의 최고주권기관으로서 국가의 기틀인 「헌법」 제정 임무를 완수하였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출범과 함께 해체되었다. 북조선인민회의는 전체 근로자들을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결시키고, 그의 혁명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을 동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정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 이전에 북한에서 입법권을 행사한 최고주권기관.
개설

북조선인민회의는 1947년 2월에 창설되었다. 회의는 3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개최되었으며, 휴회기간에는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대신하였다. 최고인민회의가 설치되기 이전까지 모두 5차례의 정기회의와 1차례의 특별회의가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 이전의 최고주권기관으로서 국가의 기틀인 「헌법」 제정 임무를 완수하였으며, 최고인민회의 출범과 함께 해체되었다.

내용

북조선인민회의는 김일성의 지도하에 1947년 2월 17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된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에서 창설되었는데, 북조선인민회의는 1948년 8월 25일에 진행된 총선거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가 설치될 때까지 입법권과 아울러 국가의 최고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기관으로서 전체 근로자들을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결시키고, 그의 혁명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동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북한은 북조선인민회의가 김일성에 의해 창건된 ‘첫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최고주권기관’으로서 항일혁명투쟁의 혁명전통에 깊은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를 창설함으로써 “혁명주권기관이 더욱 강화 발전되고,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성과들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으며, 인민이 사회주의에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혁명임무를 성과적으로 수행해 나가게 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조선인민회의의 창립을 위하여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가 1947년 2월 17일부터 20일까지 진행되었다. 특히 2월 19일에는 최용건의 「북조선인민회의 창립에 관한 보고」가 있었으며, 이에 대한 결정서가 통과되었다. 또 「북조선인민회의에 관한 규정」과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절차에 관한 규정」에 대한 초안작성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다음날 20일에는 「북조선인민회의 규정에 관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은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에 참가한 대표들과 북조선민전에서 후보를 추천한 인물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먼저 김일성을 위시하여 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6명과 평양특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및 북조선민전 산하에 망라된 3개 정당과 4개 사회단체 대표들로서 후보자추천전형위원 15명을 선출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후보자 237명이 선별되었다. 이어서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 대표들이 후보자에 대한 찬반투표를 통해 대의원을 최종 선출하였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흑백투표에 대한 반대여론을 고려하여 한 투표지에 후보 전원을 기재한 후, 반대자에 대하여 선을 긋고 새 추천자를 기재하는 투표방식이 채용되었다. 그리하여 2명의 입후보자가 낙선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237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정당별 구성을 보면, 로동당 86명(36%), 민주당 30명(13%), 청우당 30명(13%), 무소속 91명(38%)이었고,사회 성분별 구성을 보면 노동자 52명(22%), 농민 62명(26%), 사무원 56명(24%), 인텔리 36명(15%), 기업가 7명(3%), 상인 10명(4%), 수공업자 4명(2%), 종교인 10명(4%)이었고 그 가운데서 여성이 34명(15%)이었다.

회의는 3개월에 한 번씩 개최되었으며, 휴회기간에는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대신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상임위원회의 선거, 북조선최고재판소장의 선거, 북조선최고검찰소장의 임명, 그리고 대외무역의 결정, 국가안전의 보호, 인민경제계획의 채택, 국가예산의 승인, 행정구역의 신설 및 변경, 대사실시에 관한 결정의 발표 등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3개월에 한 번씩 열렸으며, 휴회기간에는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그것을 대신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 제1차 회의는 김일성의 지도하에 1947년 2월 21일부터 22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김일성은 인민회의 첫날 회의에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사업총화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통해 인민이 해방 직후부터 정권문제 해결을 위하여 투쟁해온 역사적 과정에 대하여 분석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실시한 모든 시책과 그 집행에서 이룩한 성과들을 전면적으로 총화하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인민의 총의로 조직된 북조선인민회의 앞에 자기의 정권을 위양한다는 것을 밝히면서 김일성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하였고, 이에 김일성은 인민회의의 위임에 따라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한마디로 북한은 북조선인민회의 제1차 회의를 통하여 국가의 최고집행기관을 수립할 수 있었다. 제1차 회의는 또한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선거, 「북조선인민위원회 규정」과 「북조선재판소 및 북조선검찰소에 관한 규정」의 채택, 북조선검찰소장의 임명 및 최고재판소 소장의 선거, 북조선인민위원회의선언문 통과 등 의안들을 토의하고, 결정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 제2차 회의는 북조선종합예산에 대하여 토의하고 결정한 회의로서 1947년 5월 15일부터 16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제출한 「농업현물세 개정에 관한 법령」, 「1947년 북조선종합예산에 관한 법령」, 「평안남도 내 군행정구역변경에 관한 법령」 등을 승인하는 결정이 있었으며,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제출한 북조선최고재판소 재판원(판사) 추가선거에 관한 결정이 채택되고, 그 선거가 진행되었다.

북조선인민회의 제3차 회의는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임시헌법」 초안을 작성할 것을 토의하고 결정한 회의로서, 1947년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회의에서는 조선임시헌법준비에 관한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제의를 찬동하고,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 조선임시헌법 초안을 작성하여 차기 북조선인민회의에 제출할 것을 위임하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또한 북조선인민회의 제2차회의 후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채택한 결정들을 승인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 회의는 1948년 2월 6일부터 7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김일성의 「1947년 계획실행총화와 1948년 인민경제발전계획에 대하여」 보고가 있은 후, 1947년 인민경제발전계획 실행정형을 총화하였고, 1948년 종합예산에 관한 토의와 결정이 채택되었다. 또한 북조선인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 조직된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 보고 등이 토의되었다.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는 1948년 4월 28일부터 29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회의에서는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 회의 결정에 따라 진행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에 대한 전인민적 토의사업결과를 총화하였으며 헌법제정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10개 장 102개 조)을 원안대로 찬동하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북한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였던 남조선대표 일부와 신문기자들이 방청으로 참가하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는 1948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실시에 관하여」라는 보고가 있었으며,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채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우선 북조선에서 실시할 것과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같은 해 8월 25일에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의의와 평가

북조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하기 이전에 입법권을 행사한 국가 최고주권기관의 임무를 행사하였으며, 전체 근로자들을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결시키고, 그의 혁명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동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북한은 북조선인민회의가 김일성에 의해 창건된 ‘첫 프롤레타리아독재국가의 최고주권기관’으로서 항일혁명투쟁의 혁명전통에 깊은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를 창설함으로써 혁명주권기관이 더욱 강화 발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북한정치사연구(北韓政治史硏究)Ⅰ』(김광운, 선인, 2003)
『조선대백과사전(朝鮮大百科事典) (10)』(백과사전출판사, 1999)
『백과전서(百科全書) (3)』(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정치사전(政治辭典)』(사회과학출판사, 1973)
『김일성선집(金日成選集) 2권』(조선로동당출판사, 1963)
집필자
오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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