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문학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던 문학이다. 일제하 한국문학의 저항은 일제에 대한 문학적 협력과 연관지어 살펴보아야 한다. 문학적 저항은 다음과 같은 세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백석이나 김기림과 같이 저항으로써 침묵을 선택한 경우이다. 둘째는 한설야나 임순득과 같이 우회적 글쓰기를 시도한 경우이다. 셋째는 이육사나 김사량과 같이 망명을 시도한 경우이다. 일제하에서 활동한 문학가들 가운데 한때 저항을 하였으나 이광수, 최남선 등과 같이 일본 제국에 협력하는 경우가 많다.
일제하 한국문학의 저항은 일제에 대한 문학적 협력과 연관지어 살펴보아야 그 역사적 의미가 명확해진다. 일제하에서 저항한 문학가들 가운데 한 시기에는 저항을 하였으나 이후에 일본 제국에 협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최남선이나 이광수의 경우 한때 일본 제국에 저항하는 최전선에 서 있던 문학인들이었으나 최남선은 1920년대 중반 이후에, 이광수는 중일전쟁 이후에 각각 친일 협력의 길을 걸었다.
이처럼 일제 말에 협력한 많은 문학가들 역시 그 이전에는 저항적 작가였다. 또한 문학적 저항을 고찰할 때 그것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1919년 3.1운동 이전과 이후의 저항은 각각 다른 양상을 띈다. 1919년 이전에는 국민주의와 민족주의가 그 전체를 이루었으나, 1919년 이후에는 그 이외에도 사회주의라든가 페미니즘 등이 저항의 사상적 바탕을 형성하였다.
또한,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저항은 그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중일 전쟁 이전, 일본 제국은 소극적으로 글의 내용에 있어서 특정한 것들을 금지하였으나, 중일전쟁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작가들에게 특정 내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중일전쟁 이전에는 작가의 침묵이 저항이 될 수 없었고 오히려 무능력과 무관심으로 보였으나,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요한 저항의 수단이 되었다.
일제하 한국문학의 저항은 일제말에 이르러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일제말 문학적 저항은 세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침묵이다. 국외 망명도 여러 가지 여건으로 말미암아 여의치 않고 또한 우회적 글쓰기도 내키지 않는 마당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침묵이었다. 문제는 저항으로서의 침묵을 선택한 작가들과 다른 이유로 인하여 침묵을 한 작가의 구별이 어렵다는 점이다.
당시 침묵을 지킨 작가들 중 일부는 작가에 대한 간섭과 강요가 심해지자 처음부터 침묵을 선택한 경우, 일제의 식민주의에 부분적으로 협력하다가 이대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이유로 침묵을 택한 경우, 당시의 시국적 정황과 무관하게 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글을 쓰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저항으로서의 침묵을 선택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김동리, 백석 그리고 김기림은 이 유형의 작가들 가운데 가장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동양을 강조하는 아시아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중국 · 일본과 다른 조선적인 것을 찾으려고 했던 김동리는 일본을 대표로 하는 동양과 아시아주의에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침묵을 하였다.
일본과 내선일체가 강요되는 조선을 떠나 만주로 갔던 백석은 그 곳 역시 내선일체와는 다른 오족협화가 강요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침묵하였다.
김기림은 동양주의에 함몰되여 많은 이들이 친일협력을 할 때 동양에 대한 거리 두기를 강조하면서 침묵하였다. 이러한 침묵은 일제말 가장 많은 작가들이 선택한 방법이다.
두 번째는 우회적 글쓰기이다. 이 방법은 일제하 문학인들의 저항에서 침묵 다음으로 많이 채택한 것이다. 일제 말의 혹독한 검열 하에서 일본의 식민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 검열의 망을 피해가면서 일본의 식민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방식은 작가와 작품에 따라 그 양상이 다양하기 때문에 일반화하기 매우 어렵다. 한설야와 임순득은 이러한 우회적 저항의 대표적인 문학가들이다. 이들은 주로 일본어로 글을 쓰면서 검열의 눈을 누그러뜨리면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우회적 글쓰기는 거의 곡예에 가까운 방식이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였다. 오장환의 경우 일본어가 아닌 한글을 통하여 이러한 우회적 글쓰기의 저항을 한 드문 경우이다.
세 번째는 망명이다. 이는 일제 말 문학가들이 저항으로 선택한 것 중에서 가장 희귀한 경우에 해당한다. 우회적 글쓰기를 선택한 작가들은 침묵한 작가들에 비해 그 수가 적기는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이에 비해 망명은 고향과 조국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극히 소수만이 행한 방식이었다.
우회적 글쓰기를 하다가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을 때 선택하는 것이 바로 망명이다. 현재 일제 말 망명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이육사와 김사량이다.
이육사는 우회적 글쓰기로서 시를 쓰다가 망명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육사는 망명에 실패했기 때문에 전후사정을 알려주는 자료가 현재로서는 거의 없다. 당시 이육사와 같이 망명하려고 했던 이의 증언과 주변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이육사는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검거되어 옥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김사량은 망명에 성공하였고 망명지인 태항산에서 자신의 여정을 밝힌 기행문 『노만만리』를 남겼기 때문에 당시의 정황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어 망명이 갖는 정신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