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학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식민주의 정책에 협조한 문학이다. 중일전쟁 이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작가들로 하여금 특정한 내용을 다루지 못하도록 금지하곤 했지만, 특정한 내용을 다루라는 주문은 하지 않았다. 일제말에 이르면 조선총독부는 문학의 내용에 깊이 개입했다. 이 시기에 일본의 식민주의 정책에 이바지한 문학을 친일협력의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는 자발적인 친일 협력을 통해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나 독립적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다. 친일 작가의 언어 선택에 따라 국민문학론, 이중언어론, 조선어 전용론으로 그 유형을 나눌 수 있다.
중일전쟁 이전에도 일본 제국의 식민주의에 대한 협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중일전쟁 이전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작가들로 하여금 특정한 내용을 다루지 못하도록 금지하곤 했지만, 특정한 내용을 다루라는 주문은 하지 않았다.그러나 일제말에 이르면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작가들로 하여금 특정한 내용을 다루면 ‘국민문학’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국민’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문학의 내용에 깊이 개입하였고 창작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도 저항이 될 만큼 일제의 간섭이 심해졌다. 이 시기에 일본의 식민주의 정책에 이바지한 문학을 친일협력의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친일문학은 내용과 형식,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다.
내용적 측면은 당시 협력하였던 작가들이 지향하였던 세계를 말한다.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친일협력을 하였다면, 그 지향은 큰 의미를 가지기 어렵지만, 친일협력 작가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협력하였다. 친일 협력을 하였던 작가들은 자신들이 2천만 조선 민중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인식마저도 가질 정도로, 자발적 논리를 기반으로 일본 제국의 식민주의에 협력했다.
형식적 측면은 일본어와 조선어의 사용 문제를 말한다. 당시 친일협력의 국민문학은 일본어로 창작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어로 창작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징병이 예고된 1942년 중반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어 뿐만 아니라 조선어로 창작하는 것도 인정하였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일본어만으로는 대중들을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동원을 비롯한 일본 제국의 식민주의 정책의 확산을 위해서는 조선어 문학 창작을 과도기적으로 인정해야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친일 협력을 하였던 작가들은 언어 선택에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었고, 그에 따라 세 가지 각각 다른 형태로 문학을 창작하였다.
먼저 내용적 측면에서 보면 친일협력문학은 내선일체의 황민화와 대동아공영권의 신체제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조선이 중국에 흡수되어 정체성을 상실했다가 비로소 일본과 일체가 됨으로써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였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실제로 일본 국민이 됨으로써 그 동안 받아온 차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후자는 서구 근대는 몰락하였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아공영권과 자본주의 근대를 넘어선 파시즘의 신체제라고 믿는 견해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남으로써 동양의 평화와 개인주의가 파생한 무정부성을 넘어선 전체주의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선일체의 황민화는 일본이 중국의 무한 삼진을 함락한 이후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1938년 10월 ‘동방의 마드리드’라고 불리던 무한 삼진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당하자 조선의 문학인들 중 일부는 이 새로운 사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친일 파시즘의 길로 걸어갔다.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무렵만 해도 사태의 전개에 따라서는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길이 열릴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에 그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몰렸던 것은 중국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이 해방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관망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으나, 국민당은 중경으로, 공산당은 연안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이제 동북아에서 일본의 승리는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결정적으로, 무한 삼진이라는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친일 파시즘에 협력한 문학인들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친일 협력의 길에 들어섰다. 그들은 무한 삼진의 합락을 봉건의 성문을 파괴하고 근대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광수를 비롯한 많은 문학인들은 근대화론에 입각한 내선일체의 황민화 논리를 통해 차이를 해소하고 차별을 극복하려는 생각을 갖고 친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동아공영권의 신체제론의 주요 내용은 유럽이 중심이 되어 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를 착취하던 구체제에 반하여 동아시아가 동양의 이름으로 떠오르면서 유럽적 가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는 시대 즉, 동양이 이제 스스로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더 이상 서양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동양의 이러한 부상은 파리의 함락으로 가시화된 구서양의 몰락과 맞물렸기 때문에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40년 6월 독일에 의해 파리가 함락되자, 서구 문학의 전통 속에서 파시즘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원천이 있다고 믿었던 많은 문학인들은 구 서양의 몰락을 목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정세의 전개로 말미암아 신체제가 실제로 가능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서양 중심의 세계사가 아닌 새로운 세계사를 서술하는 것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기에 근대의 극복이란 구호가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근대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체제를 갈망하였던 이들은 대동아공영권의 신체제론을 근간으로 하여 다양하게 친일 협력에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최재서는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인 논자였고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이에 가담하였다. 채만식은 서구 근대의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멸사봉공’을 외치면서 이를 근대 극복의 새로운 경지로 보았고, 서정주는 서양의 정신세계에서 탈출하여 동양의 정신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며 이것이야말로 그 동안 서양이 보여주었던 한계를 넘어서는 근대 극복의 장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근대의 극복이란 것이 그 동안 지속되었던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중심주의, 즉,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동양주의에 지나지 않는, 국가주의로서의 변형된 근대화론에 불과하다.
친일문학은 형식적 측면에서 대체로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국민문학’은 오로지 일본어로만 창작해야 한다는 일본어 전용론이다. 이왕 국민문학을 할 바에는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로 창작을 하여야 비로소 일본어의 힘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은 일본어가 이미 아시아 지역의 공통어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지방어에 불과한 조선어로 굳이 창작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과 더불어 힘을 얻었다. 이러한 지향은 갖고 있던 작가로는 시에서 김용제, 소설에서 이석훈, 평론에서 최재서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이석훈은 이러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펼친 작가이다. 그는 1942년 6월 ‘동양지광’에 발표한 글 ‘새로운 것에 대하여’에서 조선어로도 국민문학을 창작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단호하게 반박하면서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편협한 조선적인 것, 서구적인 것을 극복한다는 측면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 새로운 부대란 지금까지의 표현양식, 스타일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문학을 국어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흔히 조선어를 사용하는 명분이 대중의 계몽에 있는데 이것 역시 일본어로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석훈을 비롯하여 김용제, 최재서 등이 견지하였던 이러한 입장은 당시 문학상이라는 제도를 매개로 하여 조선총독부의 강한 지원을 받았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국어문예총독상'을 제정하여 조선에서 일본어로 창작을 하는 일본인 및 조선인 작가들을 대상으로 상을 수여하였다. 1943년 제1회에는, 김용제가, 1944년 제2회에는 최재서가, 1945년 제3회에는 정인택이 수상하였다. 이 상과 성격이 유사한 또 하나의 상인 ‘국어문예연맹상’을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만들었는데 1943년 제1회를 이석훈이 수상한 바 있다. 이 유형에 속하는 작가로는 예의 세 작가 이외에도 김종한 등이 있다.
둘째는 일본어와 조선어 두 개의 언어로 창작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이중언어론이다. 일제말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어 해독률이 대단히 낮았기 때문에 일본어로만 창작을 할 경우 조선어만 아는 대중들은 이를 접할 수 없어, 대중계몽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조선어와 일본어 양 언어로 창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제말에 친일 협력을 하였던 작가들 대부분이 유형에 속하는데, 특히 이무영은 이러한 입장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가이다. 이무영은 협력의 입장에서 일본어와 조선어로 글쓰기를 행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중일전쟁과 무한삼진 함락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던 그는 태평양 전쟁 이후에 급속하게 협력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시인 서정주와 비슷한 경로를 겪은 셈이다. 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작품을 발표하는데 일본어와 조선어의 양이 비슷할 정도이다. 일제말 이무영은 기본적으로 국민어로서의 일본어의 단일화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협력을 결정한 이후부터 줄기차게 일본어로 글을 쓸 수 있었다. 일본어를 상용하는 조선의 지식인들을 자신의 독자로 삼고 일본어로만 창작하였던 이석훈과 달리 이무영은 과도기어로서의 조선어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이무영은 누구보다도 조선의 농민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던 터라 농민들을 제외한 독자를 상정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 농민들이 일본어로 자신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는 과도기적으로 조선어로 창작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소설의 주제나 관심에 따라 언어를 달리 사용했다. 일본어로 쓸 경우 그것은 주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조선어로 쓸 경우 그것은 주로 농민을 비롯한 일본어 해독 불가능한 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언어의 선택이 주제나 관심의 대상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일본어 장편소설 ‘청기와집’과 조선어 장편소설 ‘향가’이다. 그는 조선인 지식인과 재조 일본인 지식인 사이의 내선일체적 연대를 주제로 하고 있는 ‘청기와집’은 일본어를 사용한 반면, 자작농창정을 비롯한 조선 농촌의 계몽을 주제로 하고 있는 ‘향가’는 조선어를 사용하였다.
셋째는 조선어로만 창작하는 조선어전용이다. 이태준과 이기영, 오장환, 이근영, 지하련과 같이 일제말 저항을 한 작가의 경우 조선어로만 창작을 하는 것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낸 작가들은 꽤 많다. 그러나 친일협력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주면서 조선어로만 창작을 한 경우는 드물다. 가령 일본어를 모르는 조선의 많은 대중들을 일본 정신으로 계몽시키기 위하여 일본어로 창작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어로만 창작을 한다는 식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작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어로만 창작을 한 친일협력의 문학인들은 대부분 일본어로 창작을 하기에는 언어적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상에서 일본어를 상용하는 것과 일본어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별개였기 때문에, 언어적 자신이 없을 때 선택가능한 것은 결국 조선어로만 창작하면서 협력하는 것이었다. 이 유형의 대표적인 작가로 채만식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