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 1928년 3월 수료한 후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해 1931년 3월 졸업했다. 이해 4월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1934년 졸업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법문학부 강사로 지냈으며,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와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를 지냈다. 1937년 12월 인문사(人文社)를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하고, 1938년 6월 평론집 『문학과 지성』을 발간했다. 1939년 10월부터 1941년 4월까지 『인문평론』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지냈다.
1931년 『신흥(新興)』 5호에 브래들리(Bradley,A.C.)를 소개하는 「미숙한 문학」을 발표하면서 비평가로 데뷔했으며, 이후 『조선일보』에 「구미현문단총관-영국편- 歐美現文壇總觀 英國篇」(1933)·「현대주지주의문학이론의 건설-영국평단의 주류-」(1934)·「현대주지주의문학이론」(1934)·「비평과 과학」(1934) 등의 글을 발표했다. 『동아일보』에도 「영국 현대소설의 동향」(1933)·「미국 현대소설의 동향」(1934)·「사회적 비평의 대두-1934년도의 영국평단 회고」(1935)·「명일의 조선문단」(1938)·「비평의 형태와 내용, 특히 월평을 중심으로 하여」(1938) ·「작가에 유언장」·「예이츠의 생애와 예술, 그의 복전을 접하고」 등의 글을 발표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협력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9년 2월 황군위문작가단(皇軍慰問作家團)을 발의했고, 3월 14일 황군위문 문단사절(文壇使節) 위문사 후보 선거일에 실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4월 황군위문작가단 장행회에서 경과보고를 했다. 이해 10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과 기초위원을 맡았으며, 1940년 11월 31일부터 12월 5일까지 평양·신의주·선천·진남포·해주·개성 등지에서 문예보국강연회 강사로 활동했다.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선임되었으며, 이해 10월 그동안 발행해 오던 『인문평론』을 임전체제에 부응하기 위해 『국민문학』으로 제호를 변경해 간행했다. 1941년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 6월 평론수필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해 4월에는 일본 남방종군작가와의 교환회에 참석했으며, 8월 25일부터 9월까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2차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대표로 참가했다. 1943년 11월 1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조선문인보국회 주관 결전소설 및 희곡 현상모집에서 심사원으로 활동했다. 1944년 2월 평론집 『전환기의 조선문학』으로 국어문학 총독상을 수상했다. 이해 9월 국민동원총진회 발기인과 상임이사를 맡아 일제 협력 강연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상무이사로 선임되었으며, 7월 대일본흥아회 조선지부 연구조사위원, 국민동지회 발기인 및 역원, 8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해방 후 1948년 12월 27일과 28일 시공관에서 개최된 민족정신앙양 전국문화인 총궐기대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9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기소유예됐다. 이후 연세대학교(1949∼1960), 동국대학교 대학원장(1960∼1961), 한양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64년 11월 16일 사망했다.
최재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64∼23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