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평론』은 1939년 9월 23일부터 1941년 4월까지 최재서가 발간한 문예잡지이다. 해외문학을 전공한 학문 엘리트들과 좌파 이데올로그들 및 역사철학자들의 글을 동시에 게재함으로써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담론 공간을 생산했다. 창간호의 권두언에는 일본이 주도하는 ‘동양 신질서’ 건설에 조선의 문학자들도 협력해야 할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신체제’에 투항하는 논리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좌우익 문인들의 ‘인민전선’을 모색하거나 파시즘으로의 이행을 지연시키려는 시도가 공존해 있다.
『인문평론』은 주간이자 편집인인 최재서가 1939년 9월 23일에 창간하고 1941년 4월에 폐간한 문예잡지이다. 해외문학을 전공한 학문 엘리트들과 좌파 이데올로그들 및 일군의 역사철학자들의 글을 동시에 게재함으로써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담론 공간을 생산했다.
창간호의 권두언에는 일본이 주도하는 ‘동양 신질서의 대 목표’를 위해 조선의 문학자들도 협력해야 할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신체제’에 투항하는 논리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좌우익 문인들을 대거 동거하면서 ‘인민전선’을 모색하거나 파시즘으로의 이행을 지연시키려는 시도가 공존해 있다. 『인문평론』이 동시대의 다른 문예지들과 다른 것은 아카데미즘 비평이 중심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최재서를 비롯해 조선문학, 중국문학, 일본문학을 전공한 조윤제, 김태준, 정래동, 서두수 등의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필진과 함께 서인식, 신남철, 박치우와 같은 역사철학자들 및 임화, 김남천, 이원조 등의 카프 문인들이 주요 필자로 참여했으며, 〈특집〉, 〈연재〉, 〈번역〉, 〈외국문학〉, 〈명저해설〉, 〈모던문예사전〉, 〈해외문화통신〉 등을 고정란으로 두고 외국문학을 소개 · 연구하는 글이 다수 게재되었다.
최재서는 「교양의 정신」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감과 비평 기준“을 갖고 판단하는 ‘교양의 정신’을 ‘비평의 정신’으로 치환함으로써 파시즘의 맹목성을 견제했다. 하지만 서구의 파시즘화와 제국 일본의 ‘신체제’를 목도하면서 1941년부터는 일본 당국에서 주장하는 ‘국민 문화’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전환기의 문화이론」과 「문학정신의 귀환」에서는 자기 문학의 기반이었던 서구 문화를 부정하고 거리화하면서 현대의 위기를 ‘문화의 국민화’를 통해 돌파할 것을 제안했다.
『인문평론』은 1941년 4월호 발행을 끝으로 폐간되었고, 1941년 11월부터 잡지명을 『국민문학(國民文學)』으로 바꾸어 일본 국책을 위한 ‘국민문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갔다.
프로문학 퇴조기에 출발한 『인문평론』은 당시 조선 문단의 흐름을 이끌었던 좌파 이데올로그와 해외문학 전공자들 및 역사철학자들을 총망라한 필진을 구축하고 있었다. 발행인이자 편집인이었던 최재서는 교양과 지성을 기반으로 서구문학을 대상화하면서 조선 문학의 방향을 조망하고자 했지만, 전시체제기 제국 일본의 ‘신체제’에 직면하면서 이런 전망은 중단되었다. 이에 따라 『인문평론』의 종간은 『국민문학』의 창간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