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북해(北海). 1903년 1월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났다. 1918년 일본 명치학원(明治學院) 중학에 입학하였고, 1923년 도쿄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24년 중국으로 건너갔고, 이태 뒤에 북경의 민국대학(民國大學) 영문계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에 그는 오남기(吳南基), 국순엽(鞠淳葉) 등과 함께 아나키즘그룹에 가담했다. 또한 학교에서는 영문학을 배우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중국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는 중국에는 백화문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는 『흑암(黑暗) 중의 홍광(紅光)』의 작가 향배량(向培良)에게 백화문학 작품을 배웠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뒷날 향배량의 작품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1928년부터는 우리나라 일간신문과 잡지 등에 중국문학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0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1932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고, 1941년 『동아일보』가 폐간당한 이후 보성전문학교 중국어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서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28년 『신민』에 「현대중국문학의 신방향」을 발표하였고, 1929년에는 12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중국 현대 문단 개관」을 연재하여 중국의 현대문학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에 「현대중국연극」을, 『조선일보』에 「움직이는 중국문단의 최근상」이라는 논고를 게재하여, 자신이 직접 체험한 당대 중국의 문학계와 연극계 상황을 발빠르게 전달했다. 또한 「노신과 그의 작품」을 써서 중국문학혁명의 실행자였던 노신의 작품을 소개했다. 이밖에도 그는 정서림(丁西林, 1893∼1974)의 「일수마봉(一隻馬蜂)」을 「버얼」로 번역했고, 또한 중국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시인인 전한(田漢, 1898∼1968)의 작품 「카풰의 일야(一夜)」와 「강촌소경(江村小景)」을 번역 소개하였다. 중국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중국의 현대문학에 그치지 않고, 중국고전문학 예컨대 굴원(屈原), 이청조(李淸照), 소동파(蘇東坡), 도연명(陶淵明) 등 고대 유명한 문인들과 그들의 작품, 사상을 자세히 소개·평가하는 데까지 미쳤다. 정래동은 한국의 중국문학 수용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연구자로 평가받는다. 1949년 수필집 『북경시대』를 펴냈고, 1971년에는 지인들에 의해 『정래동 전집』이 3권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