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옥구(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출생. 1934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동아일보 사회부에서 근무하였다. 1935년 『신가정』 10월호에 단편 「금송아지」를 발표함으로써 등단하였다. 이어서 「과자상자」(신가정, 1936.3.) · 「농우(農牛)」(신동아, 1936.3.) 등을 발표하며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벌였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도시 소시민들의 삶을 그린 작품도 있으나 그가 초점을 맞춘 것은 농촌이었고 그의 대표작들도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농촌소설 대부분은 농민의 실생활과 농촌 현실을 이해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
그리하여 계급적인 시각으로 그려진 ‘농민소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는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해산 이후의 문단 분위기와 작가의 기질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농촌 소재의 작품들은 농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의 목소리가 개입되어 있다.
즉, 작품들에서 계몽주의적인 색채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경향으로하여 작품의 리얼리티가 반감되고 있다. 「농우」는 ‘소생원’이라는 별명이 붙은 서 생원이 소를 담보로 잡은 채무 때문에 윤 진사에게 소를 빼앗기나 이를 강제로 찾아옴으로써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주요 갈등이 지주 · 소작인의 계급적 대립이지만, 경향적인 메시지보다는 농촌 모순의 한 삽화를 그리는데 치중하고 있다. 또한 농민들의 윤 진사에 대한 대응이 즉흥적이며 자연발생적이다. 당대 주류를 이루던 계급적 시각의 농민소설과는 변별되고 있다.
「최고집 선생」(인문평론 1940.6.)은 세태가 각박해져도 흔들리지 않는 주인공의 굳건한 자세를 그리고 있다. 권력 앞에도 절개를 버리지 않았던 서당 접장 최 선생은 자신의 큰아들이 남의 첩과 사통하다 맞아죽자, 자신의 부덕함을 탓하며 세속적인 고소를 거부한 채 만주로 이민을 갈 것을 결심한다.
유교적인 도덕관과 양심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고향사람들」(문장 1941.2.)은 식민지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날품팔이’, ‘인력거꾼’ 등 전근대적인 직업인들이 몰락하는 세태 속에서 주인공 ‘점쇠’가 농촌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북해도 인부 모집에 응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렇듯 식민지시대에 발표된 그의 작품들은 농촌과 근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을 통하여 현실의 모순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그 동안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아 1943년에 첫 창작집 『고향사람들』을 영창서관에서 발간하였다.
광복 후에 이근영은 이데올로기적인 선택과 ‘조선문학가동맹’ 측에 가담하여 활동함으로써 경향소설을 창작하게 된다. 「탁류 속을 가는 박교수」(신천지 1948.6.)는 광복 후 그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작품은 조선문학가동맹의 문화통일전선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광복 후 그는 하나의 이념을 선택하고 사회현실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작품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모는 작품 미학적으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미군정에 의해 사회주의가 불법화되는 시기인 1947년 말에서 1948년 초 사이에 월북하였다. 1949년에 아문각에서 1938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장편 「제3의 노예」를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