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동구와 접하고, 북쪽은 북구와, 서쪽은 울주군과, 남쪽은 남구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9°15′∼129°21′, 북위 35°32′∼35°35′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 37.00㎢, 인구는 24만 448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3개 행정동(18개 법정동)이 있고, 구청은 울산광역시 중구 복산동에 있다.
지리적으로 영남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울산광역시 중심부인 중구는 동쪽으로 불국사 구조선을 따라 남류하는 동천강에 의해 북구와 접해있고, 북동쪽으로는 성안천과 시례천을 따라 북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남쪽은 상류에서 구조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주변 소지류와 합쳐 동류하는 직할 하천인 태화강에 의해 남구와 각각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울주군과 접해 있다. 전체적으로 북서쪽으로 완만한 경사의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어, 동남방향으로 열린 지형을 이루며 태화강과 동천강의 합류지점인 동남부지역에 삼각형 모양으로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다.
중구의 지질은 자색세일, 사암, 회녹색세일, 사암, 응회암질사암, 역암으로 구성된 경상계 신라통 울산층이 부정합으로 피복되어 있다. 이들 지역의 북쪽에는 중생대 백악기의 경상계 불국사통 흑운모화강암을 관입하였고, 서쪽에는 규장암이 관입하여 구릉지를 넓게 형성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태화강까지 제4기 충적층이 부정합으로 피복되어 있다.
중구 지역의 북서쪽은 흑운모화강암과 규장암의 관입으로 인해 해발고도 200m의 함월산(含月山)과 서쪽으로 대봉산(大峰山, 207m), 입화산(立火山, 146m)을 비롯한 약 100~150m의 구릉지성 산지들이 연결되어 있고, 남동쪽으로는 저지를 형성하며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북서쪽이 높고 남동쪽이 낮은 지형으로 하천은 대부분 동류하거나 남류한다. 성안천, 시례천은 북쪽의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류하여 동천강에 합류하고, 척동천은 중구의 서쪽 경계를 따라 남류하여 태화강에 합류한다. 그리고 부곡천은 구 북쪽의 산지에서 발원하여 남동류하여 태화강에 합류하고, 약사천(藥泗川)은 구의 중앙에 위치한 함월산, 대봉산에서 발원하여 동류한 후 동천강에 합류한 후 남류하여 태화강에 합류하고 있다.
2007년 현재 연평균기온은 15℃, 1월 평균기온 4.8℃, 8월 평균기온 27.5℃이고, 연평균강수량은 1,135.8mm이다.
삼한시대 울산지역은 진한에 속하였으며, 현재의 중구 다운동 일대를 중심으로 굴아화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굴아화현과 율포현에 속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757년(경덕왕 16)에 굴아화현은 하곡현(일명: 하서, 동구의 효문 · 양정동 및 중구 일원)으로, 율포현은 동진현(북구의 농소 · 강동 · 송정 · 염포동 및 동구 일원)으로 개칭되어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일대에 있었던 임관군에 속하였다.
고려 태조 때 울산지역의 하곡 · 동진 · 우풍 3현이 통합되어 흥려부(일명: 흥례부)로 승격되었고 이 지역도 흥려부에 속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3개현이 단일 행정단위가 됨으로써 오늘날 울산지역의 영역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995년(성종 14)에 흥려부가 공화현으로 강등되었고, 1018년(현종 9)에는 울주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울주가 울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비로소 ‘울산’이라는 칭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1598년(선조 31)에는 임진왜란 당시 울산 의병들이 왜적을 무찌른 공이 컸던 점이 인정되어 울산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후 1895년(고종 32)에 도호부를 군으로 개칭하여 군수를 두었다가, 1910년 10월에는 면제실시에 따라 울산군 울산면으로 행정구역이 구성되었다. 1914년에 부 · 군을 정리 · 폐합하는 지방제도 개편으로 울산군은 언양군을 병합하여 19개면으로 개편되었고, 1931년 11월에는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승격되었다.
1962년 울산읍, 대현면 등이 울산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고 이 지역이 울산시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2년에 학성동을 학성동과 반구동으로 분동하였고, 1985년 북부지역이 중구로 되고, 시직할의 방어진출장소가 설치되면서 15개 동으로 분리 · 신설되었다. 1988년에는 방어진출장소가 동구로 승격되면서 중구와 분리되었고, 1990년 중구 학산동 123번지에 있던 중구청을 중구 복산동 180-1번지로 이전하였다. 1992년 1월에는 반구동을 반구 1동과 반구 2동으로 분동하여 16개동이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병영동이 병영 1동과 병영 2동으로 분동하여 총 17개동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울산시 · 군을 통합하여 통합 울산시 중구가 되었다. 이후 같은 해 3월 복산동을 복산 1동과 복산 2동으로, 태화동을 태화동과 다운동으로 분동하면서 중구는 총 19개동으로 이루어졌다. 1997년 울산시 중구가 자치구로 승격되면서 울산광역시 중구로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 과소행정동 통폐합 실시로 인하여 종전의 중구 중에서 송정동, 효문동, 진장동, 양정동을 북구로, 염포동이 동구로 이관되어 오늘날 총 14개 동을 이루게 되었다.
1966년 보물로 지정된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蔚山 太和寺址 十二支像 舍利塔)은 통일신라시대 제작된 우리나라 석종형 부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울산 경상좌도병영성(蔚山 慶尙左道兵營城)은 1987년 사적으로 지정된 것으로 1425년(세종 7)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때 왜적들이 성 일부를 헐어 현재 일부만 서동에 남아 있다. 울산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현, 시도유형문화유산)로는 1997년 지정된 울산동헌및내아(蔚山東軒및內衙)가 있다. 이는 북정동에 위치하며 조선시대 1681년(숙종 7)에 창건된 지방장관의 공무집행 장소로 쓰이던 곳이다.
그리고 학성동 일원에 위치한 울산왜성(蔚山倭城)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쌓은 왜성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염포 수군만호진성(鹽浦 水軍萬戶鎭城)은 조선시대 성종 21년 5월에 높이 15자 둘레가 1039자로 축성되었으나 지금은 성터를 거의 볼 수 없다. 반구동의 토성지는 1991년 아파트 건축 공사 때 일부 드러나 조사 · 발견하게 된 곳으로 1018년(현종 10)에 전국의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울주를 군사주(軍事州)로 만들어 동북 여진족에 대한 대비책으로 마련된 토성이었다. 마지막으로 울산읍성지(蔚山邑城址)는 조선시대인 1477년(성종 8) 10월에 쌓은 성으로 그 위치는 북정동과 옥교동에 걸쳐있었고 성남동의 일부도 성안에 들어간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헐어버린 뒤 다시 복원을 하지 못해 지금은 남은 성터가 없다.
1997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울산향교(鬱山鄕校)는 본래 반구동 구교마을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52년(효종 3)에 현재 교동에 창건되었다. 1737년(영조 30)에 건립되었던 효자송도선생정려비(孝子宋滔先生旌閭碑)는 임진왜란 때 파손되고 현재 우정동에 그 편석만 남아 있으며, 1998년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 비 지정 향토 유산으로는 총 7개가 있다. 1955년에 현 위치(서동)에 세웠다가 이를 남외동으로 한동안 옮겨졌으나 다시 이 자리에 사당을 새로 지은 것으로 삼일사(三一祠)가 있다.
다운동고분군(茶雲洞古墳群)은 1997년 울산광역시 시도기념물에 지정되었는데, 석곽 혹은 적석목관을 내부매장 주체로 하는 5~6C 대 · 중 · 소형 봉오분과 소형석곽, 목곽묘를 중심으로 하는 고분군이다. 다전 고분군(古墳群) · 고인돌은 다전마을 서쪽일대의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거대한 고분군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굴아화부족(屈阿火部族)이 남긴 유적으로 보여진다.
수운최제우유허지(水雲崔濟愚遺墟址)는 1997년 시도기념물로 지정된 것으로, 동학 제1세 교주 최제우가 1855년 3월 3일 동소 여시바윗골에서 천서(天書)를 받은 곳으로 현재 유곡동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친 외솔최현배선생생가터(외솔崔鉉培先生生家터)는 2001년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또한 유형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은장도 제작 기능도 인정받아 서동에 있는 장도장이 1993년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그 외에 모필장도 2004년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외에도 다운동에서 남구 무거동으로 이어지는 울산 구 삼호교(蔚山 舊 三湖橋)는 최초의 근대식 철근 콘크리트조 교량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화석유적으로 2톤급 육식공룡이 초식공룡인 고성룡 9마리를 추격하는 공룡공원 현장으로서 유곡동공룡발자국화석(裕谷洞恐龍足印化石)을 2000년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우정동 우정삼거리 북쪽에 있는 해묵은 느티나무는 조선시대 때부터 계변천신의 신체(神體)로서, 성황당(城隍堂)으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태화로에 이르러 보이는 강의 서편 물줄기를 용금소(龍黔沼)라 부르는데 ‘금’은 우리 국어 금, 금, 검, 곰 등과 같은 말인데 이는 왕 또는 신을 이르는 말이며, 용금소란 용왕소 또는 용신소라는 말이 되는 것으로 신라 호국불교가 낳은 신령스러운 곳이다. 이응춘의 유서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가서 순국한 이응춘(李應春)이 아들 승금에게 보낸 유서이다. 울산초등학교 느티나무는 울산광역시 천연기념물로, 옛 울산 도호부 객사(客舍)인 학성관(鶴城館) 자리에 있는 나무이다. 울산도호부 아문(衙門)에는 해묵은 느티나무가 총 네 그루 있었다. 하나는 동헌 앞에 있었고, 다른 것들은 구 울산경찰서 자리 북정동 우체국 앞에, 또 하나는 울산초등학교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동헌 앞과 구 울산경찰서에 있었던 것은 두 청사의 확장으로 잘라 내었고 우체국 앞에 있던 것은 얼마 전에 고사하고 말았다.
향교는 조선시대의 공식적인 지방 교육기관으로, 향교 건물은 문묘(文廟)와 학당(學堂)으로 이루어진다. 문묘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사성(四聖) · 이현(二賢)과 우리나라 십팔현(十八賢)을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동 · 서무(東 · 西廡)가 있고, 학당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의실인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동 · 서재(東 · 西齋)가 있다. 울산향교의 창건 연대나 초기 연혁은 임진왜란으로 기록 소실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 고을 한 향교[一邑一校] 체제가 완성된 15세기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당시에는 신학성 북쪽인 현 반구동 구교(舊校) 마을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후 그곳에 다시 세워졌다가 1652년(효종 3)에 지금 장소로 이전하였다. 1800년 이후 26번의 개중수가 이루어졌으나 기본 구조는 유지되고 있다. 8·15광복 후에는 한때 명륜중학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15년 현재 중구 지역의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21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9개교, 특수학교 2개교, 방송통신대학교 울산지역대학과 한국폴리텍Ⅶ 울산캠퍼스가 있다. 그 외 교육문화기관으로는 울산중부도서관이 있다.
북정동에 위치한 울산초등학교는 울산광역시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학교이다. 1907년 4월 울산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이래 1938년 울산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태화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는 과정을 거쳐 1955년 4월 울산국민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다. 이후 1981년 3월에는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96년에는 울산초등학교로 최종 개칭되었으며, 2003년 3월에는 성안초등학교를 분리 · 개교하였다.
2000년 1월 설립, 3월에 7개 학과로 시작된 울산기능대학은 2006년 3월 한국폴리텍Ⅶ 울산캠퍼스로 개편되었다.
중구는 울산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문화공간과 문화행사 등을 통하여 지역 문화의 부흥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중구 지역의 문화공간은 도서관 1개 소, 영화관을 포함한 공연시설 18개 소, 전시시설 2개 소, 청소년 문화의 집 1개 소, 기타시설 2개 소 등이 있다.
1984년 8월에 울산시립도서관이란 이름으로 개관한 중구도서관은 이후 1988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되었으며, 이동도서관과 문화의 집을 운영하는 등 지역주민들의 정보이용 욕구를 충족시키고 예술문화활동과 평생교육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운영되고 있다. 2000년 개소한 문화의 집은 중부도서관의 별관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화예술 관련 프로그램과 정보를 제공하는 문화체험공간으로 조성되었다. 2000년에 개소한 중구문화원은 지역고유문화를 개발, 보급, 보존하고 향토사의 조사, 연구 및 사료를 수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맞이문화마당(함월산해맞이), 정월대보름 큰잔치, 중구문화원 오월 어울마당, 봄편지노래비백일장,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사업, 국가유산 정비, 태화루복원사업 등 문화행사들을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2000년 성남동에 개관한 청소년 문화의 집은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문화형성과 확산을 위한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청소년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이 외에도 환경이 열악한 영세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청소년 공부방과 범죄예방 및 정서 안정을 위한 청소년 푸른쉼터 등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이 밖의 문화시설로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2개소가 성남동에 위치하고 있다
중구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는 3·1독립만세 재현운동이 있다. 울산병영삼일사봉제회 주관으로 삼일사에서 매년 4월에 열리는 이 행사는 3·1운동 당시 울산에서 일어났던 병영지역 중심의 시위운동(4월 4∼5일)에 참여한 순국 4열사(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분을 기념하며 역사에 빛나는 삼일정신 함양으로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북정동 울산동헌에서 이루어지는 다향제는 입춘에서 100일이 지나서 햇차가 나오는 5월 25일을 차(茶)의 날로 정하고, 차성 초의신사의 신위(茶聖 草衣神師의 神位)를 모시고 제를 지내며 그 외에도 다양한 행사들이 함께 이루어진다. 울산동헌에서 매년 10월 열리는 화전놀이는 옛부터 취락의 부녀자들이 청명, 한식날 야외에 나가 꽃을 뜯고 음식을 먹으면서 야유놀이를 하였던 우리의 미풍약속을 되살려, 알뜰하게 단장된 동헌에서 마음씨와 맵씨, 솜씨가 한데 어우러진 화전놀이 행사로 계승된 것이다. 춘계와 추계로 나누어 매년 2회 울산향교에서 실시되는 석전대제는 문묘에서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 6현, 우리나라 18현 등 유학자 25인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첫째 정일에 모시는 제사이다. 강신, 참신, 초헌, 아헌, 종헌, 분헌, 사신, 음복례 순으로 진행되어지며 대체로 200여 명이 참가하는 규모의 행사이다.
또한 매년 10월경에 향교 유림회관에서는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시인을 배출하고 고장의 대표성이 있는 소재를 선정하여 한시인으로 하여금 울산지역의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전국 한시인 및 유림을 대상으로 한시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또한 관내 초 · 중 · 고교생을 대상으로 덕출 봄편지 노래비가 건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봄 봄편지노래비 앞에서 서덕출봄편지노래비기념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격년제로 짝수년마다 시행되는 구민화합 한마당 체육대회는 구민 건강증진과 화합을 꾀하고 활기찬 사회분위기를 조성하여 광역자치구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행사로 참가자 중심의 동대항전 체육대회와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알찬 행사이다.
울산지역 주민들은 오랫동안 바다와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토속신앙이 깊다. 특히 중구 우정동과 반구동 일대에서는 오늘날까지 서낭신에게 제를 올리는 풍습이 전승되고 있다. 중구의 종교시설로는 개신교 교회가 87개, 불교 사찰이 36개, 천주교 성당이 3개가 있으며, 그 외에도 유교 및 원불교 교당이 각각 1개 소, 기타 종교시설 5개가 있다.
울산향교에서는 문묘에서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 6현, 우리나라 18현 등 유학자 25인의 위폐를 모시고 매년 음력 2월에 춘계석전대제, 음력 8월에 추계석전대제를 모신다.
약사동 자연마을에는 급속한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당집이 있는데, 해마다 대보름날이면 마을의 안녕과 화목을 비는 당제를 지내는 풍습이 아직 전해 오고 있다. 당제를 지낼 때는 마을 어른들이 모여 부정을 타지 않는 사람을 제주로 삼는다. 그리고 우정동에는 토속 신앙을 보여주는 서낭당이 있다. 이 서낭당에는 신라 때 울산도호부의 수호신인 개변천신이 모셔져 있다. 개변천신은 학성공원으로 학을 타고 내려와 고을 사람들의 운명을 관장한 천신을 말한다. 조선시대까지 이 서낭당은 울산 읍성에 있었는데 1786년(정조 10)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우정동 주민들은 마을에서 점차 사라지는 민속을 보존하자는 취지에서 서낭당 보존 위원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정월 대보름날에는 당제를 지내고 있다.
옛날 다전 마을 낙안산의 끝에는 나씨의 일족이 큰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데, 이 ‘나씨 마을’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화강 주위에 위치하여 넓고 기름진 곳으로 대대로 남달리 풍요한 마을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 수도인 경주(慶州)에서 동래(東萊)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과객들의 드나듦도 빈번하였다. 하루는 이미 해가 서산에 기울었는데 다리를 끌며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는 노인 한 분이 이 마을에 들어섰다. 삿갓을 깊숙이 쓰고 지팡이를 짚은 이 노인은 옷도 남루하여 한눈으로 보아서 걸인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노인은 마을에서 집이 가장 크고 부잣집을 찾아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주인을 찾았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조금 후에 다시 주인을 찾자 종이 나와 누구를 찾는지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길가는 나그네인데 주인을 좀 뵙고자 하네.”하니 조금 기다리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으니 이윽고 바깥주인이 나왔다. “누구인데 해 저물 무렵에 사람을 찾소?” “예. 이 사람은 월성(月城)에서 동래(東萊)로 가는 길손이온데 그만 해가 저물었기에”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주인은 “해가 저물기에 어찌 하자는 거요?”하며 되묻는 말이 아주 언짢은 눈치였다. “갈 길은 먼데 헛간에서라도 하룻밤을 머물러 갈까하오.”하니 주인은 다시 “우리 마을을 찾는 사람이 당신 한사람뿐인 줄 아오. 손님들 때문에 우리 마을은 이젠 진절머리가 나서 못살겠소. 제발 좀 손님 안 오는 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 나가들의 소원이오.”하고는 그만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거절을 당하자 노인은 하는 수 없이 다시 길을 나서 무거(無去)에 이르러 등불이 켜진 한 주막집을 찾아 밤을 쉬었다. 날이 밝자 이 노인은 다시 주막을 나서서 영취산(靈鷲山)으로 올라가 북쪽을 이윽고 살피더니 한동안 별 말이 없었다. 노인의 눈 아래는 어제 밤에 거절을 당하던 나씨들의 마을이 한눈으로 보였다. 모든 집들이 기와집인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한참동안 이 마을을 바라보며 말이 없던 노인은 한참 뒤에야 무슨 주문(呪文)을 외우더니 손에 가졌던 지팡이로 구영동 앞에서 배리끝을 거쳐 마을 쪽으로 크게 한선을 긋더니 어디로인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 갑작스럽게 서쪽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덮여 오더니 하루 종일 쉴 사이 없이 큰 비가 쏟아졌다. 밤이 되어도 비는 멈추지 않더니 새벽에야 겨우 멈추었다. 그러나 이 일대에는 많은 비로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곳곳에 산이 무너지고 강의 물줄기도 놀라게 변해서 태화강도 배리끝으로부터 나씨들의 마을을 지나 지금의 유로로 변하였고 나씨들이 살던 마을은 흔적이 없어지고 그 주위는 큰 못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이 있는 뒤에 나씨들의 영화는 끝이 났으며 어디론지 다 헤어지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그 도사의 소행이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마을 터에 새로 생겨난 못을 “나가소(羅가沼: 나씨못의 의미)”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운동 어사암(御史巖)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 말기 다운동 다전 마을에는 망조당(望潮堂) 서인충(徐仁忠)의 5대손 서달급(徐澾伋)이 다산사(茶山祠)에서 서인충을 배향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가 이 다산사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부하로부터 급한 기별이 왔다. 운곡(雲谷) 마을을 지나가는 한 나그네가 있었는데 그 풍채나 거동이 아무리 보아도 보통 선비와는 다른 수상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도호부사의 머리는 번개처럼 스쳐가는 한 육감이 있었다. 급히 걸음을 재촉하여 지름길로 난곡(蘭谷) 마을로 빠져나와 다시 발길을 돌려 운곡마을 쪽으로 오다보니 과연 큰 바위 위에서 어떤 나그네가 발길을 멈추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도호부사는 그 길손 앞으로 나아가 정중히 인사하며 성내로 길을 안내하였다 한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마는 그 길손은 다름 아닌 암행어사(暗行御史)였다 한다.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 사람들은 길손이 쉬고 있던 바위를 가리켜 어사암(御史巖)이라 하였고 도호부사가 길을 질러갔던 지름길을 ‘원고개’로 불렀다. 어사암은 높이 4m에 직경 3m되는 바위로 그 위에는 사람이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바위였다고 한다.
한편 병영동에 있는 황방산(黃坊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장티마을에서는 부엉이의 울음으로 길흉을 점쳐왔다고 한다. 황방산 북편에는 시례천(詩禮川)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부엉디미’가 있다. 돌로 된 가파른 벼랑위에 부엉이가 서식하며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고 있었음으로 그 곳을 ‘부엉디미’라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새끼를 기르고 있는 부엉이집을 찾아내면 횡재를 한다고 하였다. 어미가 없을 때 몰래 기어 올라가서 부엉이 새끼를 입을 벌려놓고는 조그마한 꼬챙이 같은 것을 가로 끼워놓고 말총으로 매어두면 새끼가 아무것도 없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어미는 새끼의 식성에 맞지 않아서 먹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여 꿩이나 토끼 같은 것을 잡아다 놓는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가서 잡아온 짐승들을 가로채 와서 먹었는데, 때로는 어미에 발견되어 공격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예로부터 이 황방산 부엉이가 아침에 울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밤중에 울면 불길하며 흉년이 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상안동에는 남쪽 신선암(神仙岩)을 바라보고 있는 바위가 있다. 그 바위가 장군 모습을 하고 있어서 장군바우라고 하고, 마을이름도 장군바우라고 하였다. 옛날 남쪽의 신선암산(神仙岩山)에 있는 신선바우는 아름다운 선녀와 같았다. 장군바우와 신선바우는 늘 마주하다 서로 정이 들게 되었다. 그래서 혼담이 이루어져 마침내 장군바우는 신선바우가 있는 곳으로 장가를 들게 되었다. 장군바우가 장가가는 날이 다가오자 분주하였다. 이때 한 여인이 근처의 시냇물에서 빨래를 하다가 보니 무슨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 귀를 기우려 보니 다름 아닌 장군바우가 신선바우에게 장가든다는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여인은 무심중에 “얄구저라, 장구바우도 장개가는가?”라고 말하고 말았다. 이 여인의 한마디 말이 그만 여름철의 서리가 되어 장군바위가 굳어버리면서 그만 그 여인을 깔고 앉아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 장군바우 근처에는 가매바우, 농바우, 안장바우 등도 그대로 굳어버려 지금도 장군바우와 더불어 남아있다고 한다.
학성(鶴城)은 본시 신라의 개지변(皆知邊)이었던 곳이다. 신라의 말기에는 계변성(戒邊城)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신라시대 울산지역의 중심은 범서면 굴화 일대였다. 신라말기에는 중앙 귀족 지배층과 지방호족 간의 대립으로 중앙의 영향력이 지방까지 못하였다. 이때 계변성에는 유력한 박씨호족(뒤에 興麗朴氏가 됨)이 대두하여 그 세력이 대단하였다. 어느 날 사람들이 북쪽하늘을 바라보니 한 천신(天神)이 학을 타고 오더니 신두산(神頭山)에 내려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뒤 이 천신은 사람들의 수록(壽錄)을 관장하는 계변천신이 되었다. 사람들은 신두산을 일러 신학성(神鶴城)이라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901년(효공왕 5) 하늘에 쌍학(雙鶴)이 금신상(金神像)을 몰고 계변성 신두산에 와서 울다가 어디론지 사라졌다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이하게 여겨 계변성을 신학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영이 있었던 병영의 지명 전설을 보면, 본래 경주 동남방 20리 떨어진 토을마리라는 곳에 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절도사가 영을 옮기고자 적지를 물색하다가 결국 만리성의 맨 동쪽 끝에 해당하는 동대산의 한 정점이 되는 기박산성 자리로 정하게 되었고, 성터를 잡아 둘레에 붉은 기를 꽂아 표시하고 사방 네 개 문 자리도 따로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좌병사(左兵使)의 군졸은 물론 가까운 고을의 장정들까지 동원하여 대 역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별안간 동해에서 일진광풍이 몰아닥쳐 성 둘레를 표시한 기 가운데 하나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계속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축성 도감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기를 쫓아갔더니 그 기는 별안산 위를 한 바퀴 도는 듯 하더니 떨어지고 말았다. 산위에 올라 기가 떨어진 곳을 보니 마치 소쿠리처럼 생긴 분지가 남쪽으로만 열려있는 지형으로 성터로는 훌륭한 곳이었다. 도감은 이를 이곳에 성터를 잡으라는 신(神)의 계시로 받아들였다. 이에 일련의 사건들이 경상감사를 거쳐 조정에 보고되어 1417년 2월(태종 17) 성이 지금의 병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터가 거마곡(巨磨谷)이라는 곳이다.
그리고 함월산에 숯못이라는 못이 있다. 그런데 이 못은 비록 작지만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과 마고할미의 얘기가 전해 오고 있다. 즉 염라대왕이 삼천갑자를 살은 동방삭이를 잡으려고 온 세상을 다 뒤져도 잡을 수 없어 마고할미를 보내어 동방삭을 잡아오라고 했는데 마고할미가 이 못에서 숯을 갈다가 동방삭을 발견하고 잡아 염라대왕에게 넘겼다는 얘기다.
중구는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울산시청을 비롯한 각종 관공서와 금융기관 그리고 상업시설이 입지한 울산 지역의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시청과 세무서 등의 관공서와 울산역, 버스터미널 등이 남구로 이전하면서 그 산업 · 교통상의 역할이 축소되었고 상권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최근에는 상권 활성화와 상권인프라 구축을 역점사업으로 설정하고, 시내 중심가의 아케이드 확대 설치와 재래시장 환경정비 및 기반시설 확충 등의 사업 추진으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유동 인구가 증가하고 매출액이 증대하는 등 구도심 상권이 점차 회복되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중구의 전체 면적은 36.99㎢로 울산시 전체의 3.5%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 임야 면적이 14.85㎢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경지면적이 6.38㎢, 대지면적 6.65㎢, 도로 3.16㎢, 하천 2.49㎢이다. 이중 18.95㎢(91.3%)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녹지 보존이 잘 이뤄지고 있는 편이다.
2008년 현재 중구의 산업구조를 살펴보면, 전체 사업체는 총 1만 4664개 업체이고, 여기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은 총 4만 2021명이다. 그 중 도 · 소매가 4271개 업체이고 그 종사자는 9966명으로 업체 수와 종업원 수 모두 그 비중이 가장 크다. 그 다음은 숙박 및 음식점업으로 2846개 업체에 종사자는 5741명이고, 기타 공공 사회 및 개인 서비스업 1877개 업체의 종사자는 3106명이다. 제조업은 959개 업체에 2308명이 종사하고 있다.
제조업체 중 종사자수 5명 이하의 영세업체를 제외한 총 사업체는 91개 업체이고 이들 업체의 월평균 종사자수는 855명이다. 이러한 제조업의 업종별 현황을 살펴보면, 업체 수 별로 기타 전자기계 및 전기변환장치제조업이 20개 업체에 174명, 섬유제품제조업 21개 업체의 252명, 의료, 정밀과학기기 및 시계 제조업 12개 업체의 79명 등이다.
그리고 금융기관은 총 20개이며, 그 중에서 시중은행 7개 소, 지방은행 8개 소, 특수은행 5개 소가 있고, 이들 금융기관은 옥교동, 성남동, 태화동을 중심으로 주로 입지하고 있다.
울산 지역의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여 왔던 중구지역의 기능은 과거보다 약화되었으나 여전히 각종 상가가 발달되어 있다. 2008년 현재 대표적인 상업시설로는 복산동과 학성동, 성남동에 각각 대형 할인점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외 울산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시장 등 시장 11개 소, 종합패션아울렛 1개 소가 있다. 중앙시장은 옥교동에 위치하며, 울산지역에서 가장 전통이 깊은 재래시장으로, 1922년 울산상설 옥교시장으로 개설되었다. 1960년에는 울산종합시장이 되면서 시장번영회도 발족되어 30여 년간 번성하였다. 그 후 건물의 노후로 새로운 시장이 발전함에 따라 상대적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1999년부터 현대적 상가 건물의 재건축을 통하여 2003년에 새롭게 개장하였다. 그리고 신중앙시장은 학산동 학성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시장 재건축 추진과정에서 중앙시장 상인들의 임시시장으로 새로운 시장 건물을 지어 1997년에 개설된 시장으로, 울산시장으로도 불리고 있다. 그 외 구 울산역을 중심으로 주변에 노점상과 일반상가가 넓게 분포되어 있으며 울산의 대표적인 새벽시장으로 유명한 역전시장, 우정시장 그리고 신울산시장이 중구의 대표적인 시장이다.
중구의 농업은 2008년 현재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가구가 819가구에 지나지 않고, 총 종사자도 2339명에 불과하다. 벼농사가 중심이고 그 외 토마토 · 배추 · 무 · 딸기 등의 채소류와 배 · 감 등의 과실류도 생산되고 있다.
중구의 교통현황을 보면, 도로 면적은 총 28만 2713㎡이며, 그 중 일반국도는 1만 402㎡로 3.7%, 광역시도 6만 4343㎡로 22.8%, 구군도가 20만 7968㎡로 73.6%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간선도로로는 7번 국도가 시가지 중심부인 동남부지역을 지나 북쪽의 경주시와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7번 국도와 14번 국도가 부산광역시와 연결된다. 또 동쪽으로는 31번 국도가 포항과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24번 국도가 밀양시와 연결되는 한편, 울산∼언양 간의 고속국도가 경부고속국도와 연결되어 외부지역과의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중구지역은 문화유적과 현대적인 테마거리가 공존하는 울산의 도시관광 중심지역이다. 가장 대표적인 관광시설로는 아케이드가 설치된 다양한 특화거리를 들 수 있다. 아케이드란 비 가림 및 차양시설을 설치한 것을 말하며, 바닥에는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쇼핑하기 편리하다. 이 아케이드를 통해 직사광선이 차단되어 여름철에는 7℃정도 저온효과가 있고, 아케이드 내부 조명시설은 미적 감각이 뛰어나 메마른 도시민의 정서를 달래주는 효과가 있다. 성남동의 보세거리, 젊음의 거리, 옥교동 중앙상가, 병영 1동 병영시장, 구 역전시장 등에 설치되어 있다. 보세거리는 울산 최초로 아케이드를 설치한 특화거리이다. 젊음의 거리는 과거 울산시의 중심상가로 상권 활성화를 위해 총 사업비 31억 원을 들여 2005년에 완공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쇼핑거리다. 아케이드 거리변에는 젊은층이 많이 찾는 대형영화관을 비롯하여 의류점, 햄버거집, 게임장, 호프집 등의 업종이 다양하게 입점하고 있어 원스톱 쇼핑장소로 유명하며, 매년 차 없는 거리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중앙상가는 수많은 음식점을 비롯하여 의류, 가방, 조화, 1000원 쇼핑, 게임방 등 다양한 점포들이 입점하고 있는 재래시장으로 울산을 대표하는 도심관광 명소의 하나이다.
중구의 명소로는 학성동의 학성공원을 들 수 있다. 태화강에 인접한 높이 약 50m의 나즈막한 학성산에 위치한 이 공원은 구한말 울산의 교육, 산업, 언론 등 각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김홍조가 이곳의 사유지 7천여 평을 사들여 흑송, 벚꽃, 매화 등을 식재한 공원을 만들어 1923년 울산면에 기증함으로써 오늘날의 학성공원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공원 내에는 보물인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蔚山 太和寺址 十二支像 舍利塔)과 봄편지 노래비, 충혼비와 울산왜성 그리고 이 공원을 기증한 김홍조의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