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5월 경상남도 기념물 ‘울산 다운동고분군’으로 지정되었다가, 행정구역개편으로 1997년 10월 9일에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면적은 17만 9,995㎡로 ‘울산 다운동유적’이라고도 한다.
다운동고분군은 구릉과 하천쪽으로 이어지는 저지대에 걸쳐 분포하며, 전체 유적의 범위는 동-서향으로 뻗은 네 줄기의 구릉을 중심으로 대략 10만여 평에 달한다. 이 유적은 울산 중심부를 관통해 흐르는 태화강(太和江)과 그 지류인 척과천(尺果川)이 만나는 지점의 북서쪽 능선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울산 중심부의 서북쪽에 해당한다.
이 고분군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1995년부터 본격적인 합동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가)∼(라)지구는 창원대학교박물관과 신라대학교박물관(옛 부산여자대학교박물관), 울산대학교박물관이, (마)지구는 울산발전연구원(현, 울산연구원) 문화재센터 에서 담당하였다.
당초 이 고분군에 대한 지표조사에서는 강변 대지에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있고 배후의 구릉부에는 외관상 확인되는 주능선부를 따라 고분들이 열지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1993년 8월 2일의 긴급 수습조사와 1995년 4월 12일부터 9월 4일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아파트건립 예정지에 대한 유적 발굴조사 결과, 척과천쪽으로 치우친 구릉에서 의외로 청동기시대 방형계 구덩주거지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고분군의 구릉은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주거공간으로, 이후 삼한 · 삼국시대에는 대규모 고분이 축조된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1995년 조사에서 10여 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는 구릉 경사면에 축조된 구덩주거지로서 집자리 평면형태는 장방형계와 방형계가 대부분이며 중복관계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오래 존속한 취락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집자리들은 모두 벽도랑〔壁溝〕을 가지고 있었고 움벽면 가까이에 판자와 점토로 벽을 만든 듯하다. 출토된 유물은 겹아가리토기 · 구멍무늬토기 · 홍도 작은항아리 · 민무늬토기 · 유경식유엽형석촉 · 돌도끼 · 숫돌 등이 있으며, 청동기시대 전기의 문화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 중 나-7호 주거지는 규모가 길이 870㎝, 너비 450㎝, 깊이 450㎝ 전후되는 장방형주거지로 원형 화덕자리〔爐址〕가 있으며 벽면 아래에 사방으로 돌려진 벽도랑시설이 있다. 또한 주거지 바닥에서 조 · 수수 · 콩 · 팥 등의 곡물이 탄화된 상태로 대량 확인되어 당시 청동기시대의 생업경제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
삼한 · 삼국시대의 고분은 널무덤 · 덧널무덤 · 돌덧널무덤 · 돌방무덤 · 독무덤 등이다. 널무덤은 1세기 후반부터 성행해 3세기까지 이어진다. 말각장방형의 무덤구덩이를 등고선 유동방향과 직교되게 깊게 굴착하였고, 경사면 위쪽에 무덤구덩이를 에워싼 반타원형 도랑을 돌려놓은 이른바 도랑움무덤〔周溝土壙墓〕이 압도적이다.
외관상 봉분(封墳)의 구조는 알 수 없지만 토광 내부의 함몰토와 무덤구덩이 바깥의 도랑 흔적으로 미루어 도랑이 돌려진 널무덤 축조단계부터 어느 정도 높이를 가진 봉분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고분은 나-15호와 19호, 가-68호가 있다. 나-19호의 경우, 유구의 규모는 길이 340㎝, 너비 120㎝, 깊이 90㎝ 정도인데 통나무의 속을 파낸 나무널을 안치하고 그것을 각재 혹은 판재로 고정했던 흔적이 보이며 축조시기는 1세기 말에서 2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된다. 부장된 유물은 목관 내부, 보강토 상부 등에 주로 매납하였다. 조합식쇠뿔모양긴목항아리 · 굽다리긴목항아리 등의 토기류와 철검 · 쇠투겁창〔鐵矛〕 · 화살촉 · 쇠낫 등의 철기류와 칠기류가 있다.
가-68호분의 경우, 무덤구덩이의 규모가 가로 4.2m, 세로 2m에 이른다. 무덤구덩이가 넓어진 널과 무덤구덩이 벽 사이 바닥에 토기를 부장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현상은 이전 널무덤 단계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이 널무덤 축조기 후기를 지나면 무덤구덩이의 규모가 좀더 커지고 내부에 덧널을 배치한 덧널무덤이 출현한다. 덧널무덤은 무덤구덩이의 장축향이 등고선 유동방향과 평행하다. 무덤의 규모는 대형으로 변하지만 무덤구덩이의 깊이는 앞 시기의 널무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얕은 바닥을 갖고 있다.
이러한 덧널무덤은 가-60호분과 같은 동혈묘광 으뜸 · 딸린덧널식〔主副槨式〕대형묘와 그 외 중 · 소형묘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가-60호분은 4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로 편년되며 규모가 길이 778㎝, 너비 180㎝, 깊이 40㎝ 정도이고, 으뜸 · 딸린덧널으로 이루어진 신라식 덧널무덤의 형태이다. 으뜸덧널의 시신 안치 공간에는 쇠투겁창이 철로 레일처럼 펼쳐져 있고, 양단 벽쪽에 항아리와 뚜껑곧은입항아리가 배치되었다. 딸린덧널은 항아리모양 토기류가 3열로 배치되나, 토기 5점을 제외하면 나머지 공간은 비워져 있다.
구덩식돌덧널무덤은 묘는 5세기대에 이르러 출현하며, 냇돌 · 깬돌 등의 석재로 축조한 움무덤 · 돌방무덤에 비해 조사 유구가 적은 편이다. 뚜껑돌이 있는 경우 또는 나무뚜껑을 사용한 예가 있고, 무덤의 양 끝에 토기류가 부장되는 모습을 보인다. 돌방무덤은 5세기 후반 이후에 집중적으로 보이며 외관상 봉분을 가진 형태가 많다.
다운동고분군은 청동기시대 전기에 형성된 주거지부터 삼국시대 6세기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대규모 유적으로서 태화강 중류지역의 선사 · 고대문화 변천 모습을 알려준다.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주거지가 입지하였고, 상당기간이 지나 삼한 전기부터는 다시 분묘군이 형성되어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묘제가 나타났다.
특히, 이 고분군은 삼한시대의 움무덤 묘제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이 고분군에서 삼한 · 삼국시대 고분의 축조시기는 2∼6세기대까지이며, 묘제의 흐름은 크게 널무덤→덧널무덤→돌덧널무덤→돌방무덤으로 변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