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광암동고분군은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2005년 7월부터 9월까지 실시된 덕풍-감북 간 도로 확·포장공사 공사구간(4차 구간)에 대한 발굴과정에서 조사되었다. 이 구간에서 백제시대 돌방무덤 2기가 발굴조사되었는데, 이 돌방무덤은 백제가 한성에 도읍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광암동고분군을 대표하는 표지적인 고분이다. 그 이외에 통일신라시대 및 조선시대 무덤들도 발굴되었다.
광암동고분군은 금암산(328.5m)의 정상부에서 북쪽 능선 아래까지 넓은 공간에 분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백제시대 돌방무덤은 북쪽 능선에 형성된 동남쪽 비탈면에서 2기가 동서로 7m 간격을 두고 조사되었다.
제1호 돌방무덤은 산 능선의 경사면을 ‘L’자로 굴착하여 무덤구덩이를 조성하고, 무덤구덩이 안에 깬돌[割石]을 평적(平積)하여 긴네모모양 널방을 조성한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의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 방향이다. 깬돌으로 조성한 벽석(壁石)은 조사 당시 7∼10단까지 남아 있었다. 1단부터 5~6단까지 수직이고, 7단부터는 점차 안쪽으로 기울여 쌓으면서 천장에 덮개돌[上石]을 얹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벽석과 굴광 사이에는 모래와 진흙을 혼합하여 다져쌓기[版築]형식으로 뒷채움하였다. 돌방 바닥은 전체를 20㎝ 두께로 흙을 깔고, 그 위에 얇고 평평한 돌을 남북방향의 긴네모모양으로 깔아 주검받침[屍臺]을 조성하였다. 주검받침의 규모는 길이 172㎝, 폭 80㎝, 높이 10㎝이다.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남북 길이가 528㎝, 동서 폭 320㎝, 깊이 115㎝이다. 그리고 널방의 크기는 남북 300㎝, 동서 168㎝, 깊이 112㎝이다. 한편 입구는 남벽의 동쪽에 우편재(右偏在) 널길을 만들었으며, 바깥 쪽에서 큰 깬돌을 쌓아 폐쇄하였다. 사람뼈는 널방 중앙에서 약간 서쪽 지점에서 동물뼈와 함께 적어도 2개체 분량의 사람뼈 일부가 출토되었다. 껴묻거리[副葬品]로는 돌방 바닥에서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곧은입짧은목항아리[直口短頸壺], 긴입긴목항아리[長口長頸壺]등이 각각 1점씩 출토되었고, 긴입긴목항아리 안에서 금도금한 반지 1점이 발견되었으며, 이외에도 철제품으로 못 52점과 꺾쇠 23점이 출토되었다.
제2호 돌방무덤은 제1호 돌방무덤의 7m 서쪽에 위치하며, 제1호보다 3m정도 낮은 해발 75m에 위치한다. 제2호 돌방의 축조방식은 무덤구덩이의 굴착이나 깬돌을 이용한 벽면의 조성 등에서 제1호 돌방과 거의 동일하다. 벽석은 10~16단 정도 남아 있는데, 10단부터는 안쪽으로 들여쌓기를 하였으며, 돌과 돌 사이의 빈틈에 작은 돌들을 끼워넣어 벽체를 단단히 고정하였다. 그리고 벽체와 무덤구덩이 사이에는 역시 모래가 혼합된 진흙을 다져쌓기방식으로 뒷채움하였다.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남북 길이 660㎝, 동서 폭 340㎝, 깊이 190㎝이다. 그리고 널방의 규모는 남북 320㎝, 동서 폭 195㎝, 깊이 155㎝이다. 한편 널방의 바닥에는 돌을 깔아 주검받침을 조성한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북벽과 서벽 사이에서 작은 돌이 깔려 있었으나 이는 도굴 과정에서 교란된 흔적으로 판단된다. 돌방 입구는 남벽의 동쪽에 편중되어 널길이 조성되었는데, 널길 바닥은 약간 경사져 있다. 입구는 큰 깬돌을 차곡차곡 쌓아서 폐쇄하였다. 돌방 바닥에서 동물뼈와 함께 2개체분 이상의 사람뼈가 출토되었다. 껴묻거리로는 주발[椀], 원형 석제품 각각 1점과 못 24점, 꺾쇠 5점 등 철제품이 발굴되었다.
백제 한성시기의 돌방무덤으로 조사된 것은 하남 광암동고분군의 돌방무덤 2기가 처음이다. 그동안 광암동 돌방무덤이 발굴되기 전까지 고고학계에서는 한성시기에 백제는 돌방무덤을 조성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해왔다. 그런데 광암동 돌방무덤이 발굴된 이후, 성남 판교 신도시 예정 부지, 연기 송원리, 안성 두교리, 서울 우면동 등지에서 백제 한성시기의 돌방무덤들이 계속 발굴되었다. 따라서 광암동에서 발굴된 돌방무덤 2기는 백제가 한성시기에 돌방무덤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기존 통설을 뒤엎는 획기적인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