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산성리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집터와 구덩유구 관련 복합유적. 세로구멍잔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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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집터와 구덩유구 관련 복합유적. 세로구멍잔존물.
개설

남한산성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986년 한양대박물관에 의해 남한산성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9년 8월∼2000년 2월까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종합적인 지표조사가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 의해 1998년 12월부터 2008년 1월까지 8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산성리 933번지 일대의 남한행궁 서원지(南漢行宮 西圓址)에 대한 제4∼5차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의 각종 토기류와 함께 구덩유구와 화덕자리 등 백제 유적이 확인되었다.

내용

광주 산성리 유적은 남한산성 내의 남한행궁지(南漢行宮址) 가운데 행궁의 서쪽 외곽담장과 상궐 사이에 위치한 서원지에서 확인되었다. 이곳은 서편에서 동남쪽으로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부는 좁고 완만한 계곡 형태를 띠고 있다. 토층은 다양하고 복잡한 편인데, 대략 3개의 기본 층위로 구분되고 있다. 제1층은 표토층으로 암석과 잡석이 포함된 갈색토층과 암거시설로 형성된 흑색토층으로 구성되었고, 제2층은 세밀하고 복잡한 구조이나 대체로 암갈색 사질점토층이며, 제3층은 풍화암반층 상부에 암석과 잡석으로 형성된 흑색 퇴적층이다. 제2층과 제3층에서 백제시대의 구덩 8기와 집터와 관련된 화덕자리 2기가 조사되었다.

제1호 구덩은 평면이 원형이며, 내부에서 잔존 폭 210×234㎝, 깊이 70~150㎝정도 되는 원형 구덩과 직경 20㎝, 깊이 20㎝인 기둥구멍[柱穴]1개가 확인되었다. 원형 구덩은 주변에서 중심부로 완만하게 굴광된 형태이며, 바닥을 점토로 다진 흔적이 있고, 소토와 목탄이 노출되는 것으로 보아 집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제2호는 원형이며, 규모는 폭 168×160㎝, 잔존 깊이 55㎝이다. 크기로 보아 저장구덩으로 판단된다. 제3호 구덩은 원형이며, 잔존 폭 162×148㎝, 깊이 40㎝이다. 벽과 바닥에 점토시설의 흔적이 있다. 제4호 구덩은 장타원형이며, 잔존 폭 102×170㎝, 깊이 70㎝이다. 제5호 구덩은 원형이며, 잔존 폭 134×116㎝, 깊이 25㎝이다. 제6호 구덩은 원형이며, 잔존 폭 156×150㎝, 깊이 30㎝이다. 제7호 구덩은 편타원형으로 길이 184㎝, 폭 96㎝이다. 제7호는 내부에서 목탄과 소토가 다량 출토되며, 형태가 편타원형이어서 가마터[窯址]로 추정된다. 제8호 구덩은 원형이며, 잔존 폭 100×100㎝, 깊이 20㎝이다. 출토된 유물을 보면, 제3호 구덩에서 항아리 아가리와 몸통조각이 출토되었고, 제3·4·6·8호 구덩의 바닥에서 연질두드림무늬토기[軟質打捺文土器]와 경질두드림무늬토기[硬質打捺文土器] 몸통조각이 소량 확인되었으며, 제6호에서 숫돌 1점이 발굴되었다.

화덕시설 2기는 계곡 하단부에서 조사되었다. 제1호 화덕의 평면형태는 긴네모모양[長方形]이고, 크기는 156×50㎝인데, 내부에 목탄이 충진되어 있다. 제2호는 직경이 80×64㎝이고, 평면형태가 타원형이며, 내부에서 목탄이 다량 함유된 소토(燒土)가 2개의 석재 사이에 충진된 형태로 조사되었다. 이들 2개의 화덕시설 주변에서는 다량의 백제시대 토기조각이 산재하고 있으며, 바닥시설의 잔해물로 보이는 적색 점토성분이 다량 노출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화덕시설과 그 주변은 집터가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

화덕시설에서 특별히 출토된 유물은 없다. 그러나 주변에서 작은항아리, 짧은목항아리, 곧은입짧은목항아리[直口短頸壺], 긴계란모양항아리[長卵形壺], 바리[鉢), 쟁반, 사발[盌], 뚜껑접시, 시루, 뚜껑 등의 다양한 기종(器種)이 다수 출토되었고, 이외에도 토기 손잡이·몸통조각·바닥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한산성은 한반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한강유역에 자리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각 시대를 막론하고 매우 중시된 지역이다. 특히 백제의 왕도(王都) 한성의 중심지였던 풍납동·방이동 일대와 겨우 5㎞ 범위 내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따라서 남한산성 내 남한행궁 서원지에서 백제시대 유적이 조사되었다는 사실은 남한산성의 정치·군사적 중요성이 백제 한성시기부터 시작되었음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성백제』(하남역사박물관, 2006)
『남한행궁지: 제4·5차 발굴조사보고서』(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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