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적에서 금관은 출토된 바 없고 금동관이 관식(冠飾)과 더불어 몇 점 출토되었다. 고구려 금동관은 사서에 등장하는 ‘조우관(鳥羽冠)’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현재 고구려의 금동관은 중국, 북한, 남한 박물관에 각기 분산 소장되어 있고 관련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한족(漢族)이나 선비족(鮮卑族)의 문물에서 계보를 찾기 어려우며, 동북아시아 조우관의 여러 형식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조우관의 출토 예가 적어 변천 양상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고구려의 금동관 가운데 다음의 3점이 대표적이다. 첫째, 중국 집안(集安) 출토품으로 전하는 요녕성박물관 소장 관식이다. 이 관식은 중간 세움장식〔立飾〕의 가장자리를 끌로 오려 깃털모양으로 장식하였는데, 외형이 장타원형에 가깝고 맨 위에는 세잎무늬〔三葉紋〕를 투조기법(透彫技法)으로 표현하였다. 좌우의 장식은 새 날개모양이다. 둘째, 집안 출토품으로 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관식이다. 3개의 세움장식이 있는데, 전체 형태는 장방형에 가깝고 가장자리에는 역시 깃털모양 장식이 베풀어져 있다. 세움장식의 중간에는 세로로 8개의 세잎무늬가 투조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셋째, 집안 태왕릉(太王陵) 주변 출토 관모(冠帽)와 관식이다. 모두 분리되어 출토되었기 때문에 원래 어떤 모습으로 조합될지 분명하지 않다. 고깔모양 관모가 2점, 새날개모양의 장식이 1점, 관테로 보이는 장식품 여러 점이 수습되었다.
이외에 평양 청암리토성 부근에서 출토된 관은 관테를 갖춘 전형적인 금동관이다. 이 관은 원래 똑같은 것이 2점 출토되었다. 세움장식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한껏 웅크렸던 인동초(忍冬草)가 막 피어나는 모습이 표현돼 있는 것도 있고, 가장자리를 불꽃무늬 대신 가위로 오려낸 다음 비틀어 꼬아 장식한 것도 있다. 이 금동관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왕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구려의 왕이나 귀족이 썼던 실용품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만든 기법이나 모양이 보통의 관과는 다르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불상의 머리를 장식하였던 보관(寶冠)으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구려 금동관은 중국 사서와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조우관의 실물자료로서 고구려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