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당은 금성대군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굿당이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며 단종의 숙부인데,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32세에 비운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전국의 무속신앙에서 금성대군을 신격화하였으며, 특히 서울과 경기지역의 많은 무당들이 그를 영험한 신으로 모셨다. 금성당도 그 중에 하나인데 원래 서울에는 진관외동(구파발) 외에 망원동(노들)과 월계동(각심절)에도 금성당이 있었다. 그러나 도시개발로 사라지고 지금은 유일하게 진관외동의 금성당만이 남았다. 구파발에는 다시 아랫금성당과 윗금성당이 있었는데 지금의 금성당은 아랫금성당이다.
금성당은 마을 주민들과 무당이 굿을 하는 공공시설로 지어진 것이며, 건축연대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국의 많은 굿당들이 사라진 현 상황에서 굿당의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금성당은 매우 중요한 건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금성당은 신을 모신 신당과 굿당을 관리하는 시봉자가 생활하는 안채가 있고 신당 앞에는 아래채가 있어서 330여 평의 대지에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二’자형의 서쪽에 익랑이 붙어있어서 신당은 ‘ㄷ’자형을 이루며 그 동쪽에 역 ‘ㄱ’자의 안채가 붙어있는 형상의 배치이다. 신당과 안채의 출입은 별도의 대문으로 이루어지는데 신당의 출입은 익랑 두 칸에 문간을 들여서 출입하며 안채는 아래채 남쪽의 일각문을 이용해 안마당을 통해 출입한다.
신당은 모두 마루로 구성되었고 대청 뒤쪽에는 벽감을 두어 신을 모셨으며 가구는 1고주 5량으로 연등천장이다. 일반 민가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막새와 망와 등이 사용되어 그 격식을 알 수 있다. 동쪽의 ‘ㄱ’자형 안채는 시봉자의 생활공간이다. 안채는 중부지방 일반 민가와 같이 ‘ㄱ’형이지만 동쪽 방을 ‘田’자 형태로 크게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1880년대 초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성당은 조선 후기 서울과 경기지역의 민간 무속신앙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2008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무신도와 각종 무구류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이전 보존되었으며 현재 금성당은 은평구의 소유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