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는 자세하지 않다. 삼척심씨(三陟沈氏) 세보에 따르면 삼척에서 대대로 살아온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 1103년(숙종 8) 11월 요나라에 파견되어 신년을 축하하였다.
심후는 윤관(尹瓘)의 여진정벌 과정에서 활약하였다. 1107년(예종 2) 12월 좌부승지 병부낭중(左副承旨 兵部郎中)으로서 내시 형부원외랑(內侍 刑部員外郞) 한교여(韓皦如)와 더불어 예종의 조서를 윤관, 오연총(吳延寵)에게 전달하고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는 한편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여진정벌이 성공한 결과 1108년(예종 3) 2월 윤관이 동북 9성의 구축과 더불어 공험진(公嶮鎭)에 비석을 세워 동북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이후 여진의 끈질긴 9성 반환 요구와 기습공격에 따라 고려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1109년(예종 4) 5월 좌승선(左承宣) 심후는 동북 9성에서 철수하던 동계(東界) 군사들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은병(銀甁) 40개를 나눠주었다. 또한 같은 해 7월 윤관·오연총이 돌아오는 길에 심후는 왕의 명을 받고 도중에 부월(斧鉞)을 거두기도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건덕전(乾德殿)에서 조회를 열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윤관·오연총 등의 패전 책임을 물어 죄주기를 청하자 심후는 왕의 명령을 받들고 그들을 선유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심후는 여진정벌에 찬성했던 정치세력이었으며 예종의 측근으로서 신임을 받았던 문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