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자세하지 않다. 최자호(崔資顥)는 사천대(司天臺) 소속의 관리로서 천문과 지리에 밝았다.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했을 때 추관정(秋官正)으로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최사추(崔思諏), 어사대부(御史大夫) 임의(任懿),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 등과 더불어 남경의 터전을 돌아보았다.
1105년(예종 즉위년) 11월 사천소감(司天少監)으로서 내시지후(內侍祗侯) 지록연(智祿延), 주부동정(注簿同正) 은원충(殷元忠), 사천소감 허신경(許藎卿) 등과 더불어 동계(東界)의 산천을 돌아보았다.
1107년(예종 2) 12월에 최자호는 일관(日官)으로서 여진정벌 이후 정복한 지역의 지형을 살폈다. 이때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950칸의 성을 쌓아 영주(英州)로, 화관산(火串山) 아래에 992칸의 성을 쌓아 웅주(雄州)로,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칸의 성을 쌓아 복주(福州)로,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70칸의 성을 쌓아 길주(吉州)로 각각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