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방법 논쟁 ( )

현대문학
개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해산을 전후하여 문단에서 벌어진 문학의 세계관과 창작방법에 관한 논쟁.
정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해산을 전후하여 문단에서 벌어진 문학의 세계관과 창작방법에 관한 논쟁.
개설

창작방법논쟁은 카프 해산기에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기계주의적이고 공식적인 이론을 비판하며 제기되었다. 유물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카프의 당위적 명제는 실제 창작에 심각한 빈곤현상을 초래하였다. 이 시기소련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제창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창작방법에 관한 논의가 촉발되었다.

창작방법논쟁은 논자에 따라 각기 다양한 원칙이 제시되었지만, 이 논의의 주요 골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론이었다. 논의 과정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적용 문제 외에도 세계관과 창작방법의 관계 규명,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시각의 차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한 속성인 혁명적 로맨티시즘의 규정 문제 등이 대두하였다. 이는 프로문예 비평의 퇴조에 관련되는 전문단적 현상으로서 리얼리즘 문제와 결부되었고, 정치와 예술에 대한 미학적인 정합성, 곧 사상성과 예술성에 대한 최초의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창작방법 논쟁의 발단은 1932년부터 시작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성립에서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1932년 소비에트 작가동맹을 추진하면서, 라프(RAPF)의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비판하고 사상성 외에 높은 문학성의 결합을 추진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제창하였다. 러시아의 이런 변화는 곧 일본(1933-1934년)과 우리나라(1933-1936년)에 유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치와 문학의 결합으로서 유물론적 미학의 문제, 반영론적 미학의 문제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나 창작방법 논쟁은 명확한 해설이나 납득할 만한 문제가 제출되지 못하고 여전히 창작과 유리된 공소한 이론으로 전개되었다.

내용

1930년대 창작방법 논쟁은 대체로 두 시기로 구분한다. 제1기(1933-1934년)는 백철, 안막에 의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소개되는 시기이고, 제2기(1934-1936년)는 안함광, 한효, 김두용을 중심으로 세계관과 창작방법의 문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도입 여부에 대한 토론 시기이다.

제1기 ―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은 백철의 「문예시평」(『조선중앙일보』1933.3)을 통해서이다. 백철은 이 글에서 소비에트에서 기존의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 수정되고 새롭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제창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이후 발표한 「두 가지의 창작방법―심리적 ‘리얼리즘’과 사회적 ‘리얼리즘’」(『조선일보』1933.9.16)에서는 과거의 창작방법이 “예술의 형상적 서술성을 무시”하였고, 예술이 “형상을 비는 사유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이후 카프 강경파였던 안막은 「창작방법문제의 재검토를 위하여」(『동아일보』1933.11.29-12.6)에서 좀더 자세한 내용의 소개와 함께 이를 적극 수용하여 기존 창작방법의 ‘유물변증법의 도식화’를 폐기하자고 제안하였다. 김우철 역시 과도한 이론 제시로 인해 실제 창작은 이를 따르지 못해 문단이 ‘소화불량’(「재토의에 오른 창작방법 문제」, 『조선일보』1933.12.15)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였다.

제 2기 ― 박영희는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동아일보』1934.1.6)에서 문학 창작이 고정화되고, 이론이 법전으로 작가에게 지시하는 문단의 현실을 가리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라고 표현하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창작옹호론으로 파악하여 자신의 전향을 합리화하였다. 백철 또한 「비애의 성사」(『동아일보』1934.12.22-27)와 「현대문학의 과제인 인간탐구와 고뇌의 정신」(『조선일보』1936.1.12-21)에서 전향을 선언하며, 일체의 정치성을 부정하고, 인간탐구의 대상으로 지식계급을 설정한다.

카프 맹원들의 전향선언을 접한 김남천은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전환의 문제」(『형상』1934.3)에서 안막의 이론을 비판하며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 도식주의에 빠진 문제점은 수긍하나 소련과 조선의 현실 차이에 유의해야 하며, 특히 정치와 예술의 분리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김남천의 이러한 주장은 새로운 리얼리즘이 갖는 미학상의 원칙에 의해 접근하기보다는 문예정책적 문예운동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임화 역시 「낭만적 정신의 새로운 구조」(『조선일보』1934.4.19-4.25)에서 새로운 창작방법론을 계기로 하여 등장하는 우익일탈주의를 경계하며, 인간의 정신적 활동, 주관적 측면이 갖는 적극적 의의를 강조한다.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제창과 함께 대두한 혁명적 낭만주의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이기영, 이동규 등 작가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은 “현단계에 있어서 한 개의 훌륭한 청신호”라며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했으며, 권환 역시 “세계관과 현실과의 본말전도, 세계관과 방법과의 혼동, 세계관의 과중 평가” 등의 이유를 들어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오류를 비판하였다.

반면 안함광은 「창작방법문제 신이론의 음미」(『조선중앙일보』1934.6.17-6.30)에서 과거 창작방법론의 구체적 분석을 통해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 갖고 있는 적극적 의의를 추적하여 독자적으로 유물변증법적 리얼리즘을 제창한다. 그는 비예술적 공리적 작품의 범람과 비평의 관료화·도식화가 전적으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탓이 아니며, 모든 계급적 문학의 발달에 있어 불가피한 단계로 이해해야 한다며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타당성을 적극 피력한다. 이에 대해 한효는 「소화 9년도의 문학운동의 제동향」(『예술』 2, 1935.4)에서 안함광의 이론이 인식부족에 의한 주관적 내성의 논조라고 비판하며, 창작상에 있어서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의 정당한 융합이야말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하였다.

이후 창작방법 논쟁은 주로 한효 대 안함광, 김두용 간의 슬로건 채택을 둘러싼 사회주의 리얼리즘 대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 중심축이 되었다. 이들의 논의는 주장과 반박, 재반박의 과정을 거치며 지엽적인 문제에 매몰되어 갔으며, 1936년까지 프로문학 진영에서 조직 내분과 겹쳐 복잡한 양상으로 논쟁이 펼쳐졌다. 결국 팽팽히 맞서던 논쟁은 한효의 주장과 같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 쪽으로 논의가 모아졌으나 1937년 경에 이르면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창작방법논쟁은 4년여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김남천, 안함광, 김두용 등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을 거부하는 측에, 안막, 이기영, 이동규, 한효 등이 찬성하는 쪽에 서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전자의 주장은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이 몰고 올 수 있는 조직의 해소 및 정치주의에서의 일탈을 우려하는 것이었고, 후자의 경우 과거의 창작방법론으로 인해 창작이 질식된 상황을 비판하고, 프로문예이론의 국제적 연대성을 들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을 찬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창작방법논쟁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론 자체에 대한 원론 수준의 추상적인 논의로 시종했고, 작가의 창작 경험이나 작품 실례의 분석 등을 배제하다 보니 실제적인 창작에 필요한 구체안은 전무하였다는 한계를 지닌다.

의의와 평가

카프 해산을 전후로 전개된 창작방법 논쟁은 프로문학 최후의 논의이며, 전향론을 업고서 작가·비평가들에게 새 출발의 계기를 마련해 준 논의로 그 중요성이 있다. 즉 창작방법 논쟁은 결국 창작의 실적과는 무관하게 프로문학 진영의 해체와 전향의 지렛대 구실을 하고 말았다는 평가와 함께, 김용제(金龍濟)·한효(韓曉)·박승극(朴勝極)·안함광(安含光)·백철(白鐵)·최재서(崔載瑞) 등에 의해 프로문학을 극복하여 기교주의적 모색 비평의 길을 열게 하였다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참고문헌

『카프해산기의 창작방법 논쟁』(임규찬·한기형 편, 태학사, 1990)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김윤식, 일지사, 1976)
「소설개조론 연구 ― ‘고발문학론’을 중심으로」(김흥식, 『비평문학』 37, 2010)
「1930년대 창작방법 논쟁과 카프 문학의 미학」(정희모, 『비평문학』 13, 1999)
집필자
이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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