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대중화론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내부에서 벌어진 문학의 대중화 방법에 관한 논의이다. 1927년 카프(KAPF)의 제1차 방향전환 이후 김기진이 제기했다. 그는 노동자, 농민에게 마르크스주의 즉 계급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교양 정도가 낮은 이들까지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중화론은 카프의 당위론적, 추상적 문예운동에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나 일본 문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도입했다는 점과 문예 독자의 규정을 안이하게 했다는 점에서 반론을 야기했다. 이후 논의는 안막을 중심으로 한 볼세비키 대중화론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논의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김기진(金基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문학대중화론은 1927년 카프(KAPF)의 제1차 방향전환(목적의식적 방향전환) 이후, 프로문학 창작이 위축되고 발표한 작품조차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할 뿐더러 검열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비평가 김기진이 제기한 것이다.
김기진은 1926년 박영희(朴英熙)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내용 · 형식 논쟁 때 조직의 압력을 못 이기고 문예형식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바 있는데, 1928년 대중화론을 통해 자신의 문학론을 재론한다.
김기진의 대중화론은 「문예시대관 단편― 통속소설 소고」(『조선일보』 1928.11.9∼11.20)를 시작으로, 「변증적 사실주의―양식 문제에 대한 논고」(『조선농민』 32호, 1929.3)와 「대중소설론」(『동아일보』1929.4.14-4.20)을 발표하며 문학의 대중화 논의를 펼쳤다. 김기진의 글에 임화, 김두용, 안막 등이 반론을 제기하며 논의는 논쟁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김기진의 문학대중화론은 문학을 통해 노동자, 농민에게 마르크스주의 즉 계급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교양 정도가 낮은 이들까지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독자 대중에 관련된 문제로 문학표현 방법의 문제, 즉 형식의 문제로 귀결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앞서 박영희와 벌인 내용 · 형식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것으로, 내용 · 형식 논쟁이 문학의 본질 문제를 거론했다면, 대중화론은 문학 형식론의 각론에 해당한다.
김기진의 대중화론은 「문예시대관 단편 ― 통속소설 소고」를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글에서 김기진은 “극도로 재미없는 정세에 우리는 붓을 꺾을 수 없고 반동적 문예에 대중이 감염되는 것을 막으려면 통속소설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통속소설의 본질과 소재, 표현방법 등을 설명한다. 그는 통속소설을 보통인의 견문과 지식의 범위 내에서 소재를 취하되, 사건의 사회적 · 물질적 · 역사적 원인과 동기를 객관적이고 평이, 간결하게 표현한 소설이라고 규정한다.
방법으로는 문체와 용어를 평이하게 할 것, 낭독에 편하게 할 것, 화려하게 할 것, 간결하게 할 것, 성격 묘사보다 심리묘사와 사건의 기복을 명백히 할 것, 가격을 싸게 할 것 등을 들었다. 특히 대중화론이 독자의 확보 문제로 시작된 것인 만큼 소설의 독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의 교양에 맞는 소설을 창작하자고 제안한다. 즉 부인, 소학생,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노인, 청년 등 보통 독자에게는 통속소설을, 각성한 노동자, 진취적 학생, 실업청년, 투쟁적인 인텔리겐차 등 교양있는 독자에게는 원칙적 프로소설을 읽게 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주입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김기진은 「대중소설론」에서 ‘통속소설’이란 용어를 폐기하고, ‘대중소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김기진이 말하는 대중소설이란 “단순히 대중의 향락적 요구를 일시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요, 그들의 향락적 요구에 응하면서도 그들을 모든 마취제로부터 구출하고 그들로 하여금 세계사의 현 단계의 주인공의 임무를 다하도록 끌어올리고 결정하는 작용을 하는 소설”이다. 이 글은 대중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침으로,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로 나누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대중소설의 내용은 ‘제재를 노동자 · 농민의 일상 견문에서 취할 것, 물질생활의 불공평과 그 제도의 불합리로 야기되는 비극을 주요소로 하고 그 원인을 명백히 인식하게 할 것, 숙명적 정신의 참패를 보이고 동시에 새로운 힘찬 인생을 보일 것, 신구도덕의 가정적 충돌에서 반드시 신사상의 승리로 할 것, 빈부갈등은 정의(正義)로서 다룰 것, 연애를 취급함도 좋으나 배경으로 사용할 것’ 등을 들었다.
방법론은 「문예시대관 단편 ― 통속소설 소고」와 유사하며, ‘전체의 사상과 수법은 변증적 사실주의의 태도로’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그는 또 대중의 교양에 따라 소설을 프로소설과 대중소설로 이분하였다. 이 역시 앞선 논의와 유사한 내용이다.
김기진의 대중화론은 이후 「단편서사시의 길로」, 「프로시가의 대중화」 등의 글을 통해 시 장르로까지 확대되었으며, 「예술운동에 대하야」, 「예술의 대중화에 대하야」, 「예술운동의 1년간」 등의 글을 통해 반복되었다.
그러나 김기진의 문학대중화론은 일본의 비평가 임방웅(林房雄), 구레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의 이론을 거의 그대로 도입하여 대중의 한국적 파악, 사회적 구조와의 해명이 없었다는 데 그 한계가 있다. 대중을 막연한 무지의 독자층으로 보고 출발했다는 것은 안이한 논리였고, 방법론으로 제시된 여러 항목 또한 불투명할 뿐 아니라 중복되거나, 지나치게 상식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김기진의 주장은 임화(林和), 안막(安漠), 김남천(金南天), 조중곤(趙重滾) 등에 의해 대중추수주의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임화(林和)는 「탁류에 항하여」(『조선지광』 86호, 1929.8)에서 탄압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문학의 형식문제가 아니라 보다 혁명적인 투쟁이 요구된다고 전제하며, 김기진의 주장이 ‘원칙의 치명적 무장해제적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는 명백히 ‘합법성의 추수’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임화 역시 작품행동과 정치투쟁을 동일시하며, 문학을 선전, 선동의 수단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한계를 보인다.
이런 조직 내 입장 분화는 필연적으로 조직의 정비를 요구하게 되었고, 임화 및 카프 동경지부는 대중화논쟁을 통해 카프 조직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결국 1930년 김기진은 「예술운동의 일년간」(『조선지광』, 1930.1)에서 기술문제를 오직 객관적 정세의 측면에서 제기했던 자신의 행동이 오해를 살만한 것이었다며 자신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후퇴했다.
김기진이 객관적 정세보다 운동 자체의 필연적 요구로 기술문제가 대중화 문제와 더불어 제기된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자 대중화논쟁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논의는 대중화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예술운동의 볼세비키화를 내세운 안막을 중심으로 한 볼세비키 대중화론으로 넘어가게 된다.
안막(安漠)은 「프로예술의 형식문제」(『조선지광』, 1930.36), 「맑스주의 예술비평의 기준」(『중외일보』, 1930.4.195.30) 등의 글을 통해 문예대중화의 이론적 면모를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안막은 프로예술의 ‘아지프로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 ‘대중성 있는 작품을 생산하기 위한 신형식의 탐구’가 필요한데, 형식 이전에 요구되는 프로예술의 내용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필요를 반영한 혁명적 이데올로기, 즉 프롤레타리아트 전위의 혁명적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며, 궁극적으로 우리 예술이 갈 길은 내용과 형식이 변증법적 교호관계를 맺고 있는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이라고 규정한다.
대중화 논쟁에 참여한 논자들은 대부분 문예를 정치의 수단으로 이해했다는 데서 공통적이다. 이들은 정치투쟁의 우선성을 내세워 예술운동의 원칙을 독단적으로 규정하였다. 또 독자 대중을 단순히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만 파악한 것도 유사하다. 다만 김기진의 경우 수단으로서의 문예가 어떤 방법에 의하여 그 효용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탐색했다는 데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식민지 현실에서 독자의 사정을 감안한 대중화의 방안을 탐색하고자 한 김기진의 주장은 결국 봉쇄되고 말았다.
김기진의 문학대중화론은 카프의 1차 방향전환으로 인한 작가들의 창작의욕 위축, 카프 자체의 기관지 미확보, 엄격한 검열제도, 대중의 향배(向背) 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그의 대중화론은 카프의 당위론적, 추상적 문예운동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일본 문학계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도입했다는 점과 문예독자의 규정을 안이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아 카프 소장파들의 반론을 야기했다. 대중화론을 계기로 카프의 주도권은 카프 동경지부를 이끄는 소장파에게 넘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