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바허바사장 (―)

사진
단체
1946년 1월, 김진수와 김주성이 지금의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공동으로 창업한 사진관.
단체
설립 시기
1946년 1월
해체 시기
1994년
설립자
김진수, 김주성
설립지
서울 을지로
소재지
서울 을지로
전신
서울사장
후신
허바허바사장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허바허바사장은 1946년 1월 김진수와 김주성이 지금의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공동으로 창업한 사진관이다. 촬영부터 현상과 인화 그리고 앨범 제작에 이르기까지 사진의 전 영역을 포괄하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영업 방침을 천명했다. 한편 1947년 서울에 창립한 좌익 계열의 사진단체인 조선사진동맹의 본부 사무실로 사용하며, 동시에 조직의 활동 자금을 마련할 목적도 있었다. 사진관의 사진사와 영업장소는 몇 차례 바뀌었지만 현재도 영업을 하고 있으며, 서울시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정의
1946년 1월, 김진수와 김주성이 지금의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공동으로 창업한 사진관.
설립 목적

허바허바사장은 1930년대 후반 일본 도쿄의 오리엔탈사진학교[オリエンタル寫眞學敎]에서 사진 공부를 같이한 김진수(金珍洙)와 김주성(金周聖)이 1946년 1월 지금의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공동으로 창업한 사진관이다. 촬영부터 현상과 인화 그리고 앨범 제작에 이르기까지 사진의 전 영역을 포괄하여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영업 방침을 천명했다.

한편 김진수의 주도로 1947년 창립한 서울의 좌익 계열 사진단체인 조선사진동맹의 본부 사무실로 사용하며, 동시에 조직의 활동 자금을 마련할 목적도 있었다.

상호의 유래

허바허바사장이란 이름의 유래와 설립 과정에는 다양한 증언과 설이 있지만 가장 신빙성이 높고 합리적인 증언은 당시 서울에서 사진관과 사진재료상을 겸했던 김산석(金山石)의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사진관이 입주한 건물은 주인이 중국인 화교로 1층에서 허바허바회관이라는 바(Bar) 겸 중국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고, 3층에는 김백봉무용연구소가 입주해 있었다. 중국인 주인이 해당 건물에서 사진관을 하려면 ’허바허바‘라는 명칭을 따르라고 조건을 걸어 결국 허바허바사장(寫場)이란 이름으로 2층에 입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실제 기록을 보면 김진수와 김주성이 공동으로 사진관을 창업하고 『자유신문』 1946년 1월 11자에 처음 개업 광고를 냈을 때 상호는 서울사장(寫場)이었다. 하지만 열흘 후 인 1월 21일자에는 사진관의 이름을 서울사장에서 허바허바사장으로 개명(改名)한다는 공고를 다시 게재했다. 건물주가 상호 변경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관의 이름 ‘허바허바’가 탄생했다.

‘허바허바’, 영어로 ‘hubba-hubba’는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한 속어로 쓰이는 단어이다. 1940년대 당시 명동에 다수 거주했던 화교들이 술자리에서 ‘마셔라, 마셔라!’라는 뜻의 중국어 ‘허바, 허바![喝吧, 喝吧!]’를 자주 외쳤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식당의 상호로 사용할 만 했다. 또 허바허바는 영어로 ‘좋다’, ‘멋지다’라는 뜻도 갖고 있어서 영어 ‘hubba-hubba’에서 왔다고 해도 문제는 없다. 건물 주인이 중국인 화교이었고, 1945년 미군정청(美軍政廳)의 미군 출입가능 업소 명단에 허바허바회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 작명으로 보인다.

주요 활동

사진관 영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1947년 6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는 인물들이 모여 조선사진동맹을 결성했다. 위원장으로는 이태웅(李泰雄), 부위원장으로는 이용민(李庸民), 서기장으로는 김진수(金珍洙)를 선임했고, 동맹 사무실의 본부를 허바허바사장 내에 두었다. 또 동맹의 재정부장으로 사진관을 실질적으로 운영한 김주성(金周聖)을 선임했다. 따라서 허바허바사장이 조선사진동맹의 핵심 기지였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48년 8월 조선사진동맹의 역량을 집중해 열었던 ' 임석제 예술사진 개인전을 가장 크게 후원한 곳도 허바허바사장이었다.

설립 직후부터 상당한 고객을 확보하고 조선사진동맹의 사무 공간으로 사용하던 허바허바사장은 1948년 9월부터 김주성이 단독 대표를 맡고 실질적으로 사진관을 운영했다. 사진관 설립을 주도한 김진수가 그 해 8월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열린 북한 정권의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월북하고 북한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1948년 12월에 시행한 ‘ 국가보안법’에 따라 1949년 6월 설치한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 문화계의 좌익 세력을 불법화하고 색출하면서 사실상 조선사진동맹은 와해되고 말았다. 이때 김주성도 동맹과 사진관 활동을 중단하고 검거를 피해 잠적했으며, 1951년 1·4후퇴 후 다시 북진해 서울을 수복한 경찰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사진관은 김주성 밑에서 조수로 일하던 김영호가 대신해서 운영했다.

1964년 사진관의 원 주인인 김주성이 감형을 받고 출소해 사진관에 복귀했다. 김주성을 대신해 사진관을 운영하던 김영호는 따로 독립해서 뉴서울사장(寫場)을 개업했다. 그 사이에 김주성과 이혼한 부인 고윤화가 1959년 근처 을지로에 따로 허바허바사장을 열고 영업을 이어갔다. 1959년부터 나중에 김주성이 사망한 1994년까지는 서울에 동시에 2개의 같은 이름의 사진관이 있었던 것이다. 김주성과 고윤화는 1976년 공동의 명의로 ‘허바허바사장’이란 상호를 특허청에 등록했고, “이 상표에 관한 권리는 두 사람에게만 전속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상속도 하지 못한다”는 두 사람 사이의 약정에 따라 김주성의 사망 이후 원래의 허바허바사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울미래유산’인 현재의 사진관은 고윤화가 창업한 두 번째 허바허바사장이다.

의의 및 평가

허바허바사장은 1946년 창업해서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변화와 굴곡을 겪으며 현존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진관의 명칭이다. 창업자인 김진수는 북한정권 수립 이후 1950년대 말까지 북한 문화예술계의 핵심 인사로 활동했고, 공동창업자인 김주성과 그의 부인은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잘 적응해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사진관을 일구었다. 한반도 분단과 고착의 모든 과정을 응축한 상징적 이름이다. 사진관의 사진사(寫眞師)와 영업장소는 몇 차례 바뀌었지만 현재도 영업을 하고 있으며, 서울시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참고문헌

단행본

박주석, 『한국사진사』(문학동네, 2021)
조용중, 『미군정하의 한국정치현장』(나남, 1990)

논문

임석제, 「사진에 남기고 싶은 기록들」(『한국사협』 1992년 2월호, 한국사진작가협회, 1992)
최인진, 「조선사진동맹과 조광구락부」(『한국사진』, 2008년 3월호, 한국사진작가협회, 2008)

신문·잡지 기사

『매일경제』(1995. 2. 19.)
『사진문화』(1948. 7.)
『대동신문』(1946. 2. 9.)
『자유신문』(1946. 1. 21.)
『자유신문』(1946. 1. 11.)
집필자
박주석(명지대 교수, 한국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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