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공심돈은 1796년(정조 20) 3월 10일에 완공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1935년에 수리되었으며 당시 수리에 관한 도면 자료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5년과 1993년에 유지 보존을 위한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다.
서북공심돈은 중국의 『성서(城書)』 제도에 따라 치(雉) 위에 돈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은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치를 만들고, 그 위에 전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망루 꼭대기에 포사(舖舍)를 지어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다. 높이는 치가 15자, 벽돌로 축조된 부분이 18자, 그리고 공심돈 상부의 목조건물까지 포함한 높이는 약 13m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변이 넓은 평지이고 옆으로 낮은 성벽이 연이어 있어서 실제보다 더 높아 보이며, 방어 성능도 뛰어났을 것으로 판단된다.
공심돈의 하부 치성(雉城)은 방형의 석재로 쌓았는데 아래는 장방형 석재를 세로로 세워쌓고, 위쪽은 가로로 눕혀서 쌓았으며 모서리는 비교적 큰 석재를 사용하여 둥글게 원호로 쌓았다. 성벽 높이까지 흙으로 바닥을 채웠으며 그 위에는 전돌로 가운데를 비운 방형 통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 내부에 3개 층을 구성했다. 내부는 목조 기둥과 보, 도리, 마루귀틀 등으로 가구(架構)하여 층을 구성하였다.
1층은 바닥이 강회다짐이고, 2층과 3층은 마루를 깔았다. 각층은 목제 사다리를 놓아 오르내리게 하였다. 3층 망루에 포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이다. 벽면 위쪽 판문에는 전안(箭眼)이 뚫려 있으며 돈대의 외벽에도 총안과 포혈(砲穴)을 뚫어 군사들이 밖을 내다보면서 화살과 화포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은 중국의 『성서』 제도에 따라 치성 위에 공심돈을 설치한 형식이다. 석재와 전돌, 목조를 기능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치성의 석재 쌓기 기법과 상부의 공심돈의 전돌의 축조기법, 현안과 총안, 전안 등의 중요한 시설 등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조형미를 갖고 있다.
돈의 내부가 비어 있는 공심돈의 형식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처음 있는 것으로 현존하는 성곽건축에서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서북공심돈은 성곽과 전축, 누각 모두 200여 년전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독창적인 형태와 조형미로 인해 바로 옆에 있는 화서문과 함께 수원 화성의 상징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