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신규(申珪),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성사제(成思齊), 이경(李瓊)서중보(徐仲輔)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서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이곳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 곳 사람들이 과거에 응하지 않았으며 사회와 단절하고 은거하였으므로 두문동(杜門洞)이라 하였다.
1740년 영조는 이곳을 지나면서(영조 16년 9월) 승지에게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시를 짓게 하였다. 1751년(영조 27년 9월)영조는 고려두문동 72인의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고, 어필로써 “고려 충신의 명성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에 (비를)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14자를 써주고 비를 세우도록 하명하였다.
비의 형식은 거북받침과 비몸, 합각지붕의 비머리로 되었다. 비의 구성과 크기, 조각 등은 표충비와 기본적으로 같다. 비의 음기에는 고려 충신 72명을 추모하여 왕의 특별지시에 따라 그 손자벌 되는 사람이 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두문동 72현’이라는 용어는 조선후기에 와서야 확립된 개념이다. 명단이 72명으로 고정된 최초의 문헌은 1872년(고종 9)에 나타난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기우자(騎牛子)이행(李荇)의 후손이 편찬한 문집 ‘기우집(騎牛集) 임신본(壬申本)이 그것이다. 그리고 두문동 72현을 새롭게 꼽은 또 다른 문헌은 1924년에 강호석이, 1860년(철종 11)에 간행된 ’화해사전(華海師全)의 명단을 참조해 작성한 ‘전고대방(典故大方)’이란 인물지(人物誌)다. 두 문헌은 명단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겹치는 인물이 30명이고, 42명이 서로 다르게 선정되어 있다. 그 이유는 ‘기우집’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고려말 충신들을 포괄적으로 선정했고, ‘전고대방’은 두문동에 들어갔던 시기를 중심으로 좁혀 뽑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