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화순 출생. 본명 여상현(呂尙鉉).
전남 화순의 동복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 중동학교를 수료한 후 1935년 전북 고창의 고창고보를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39년 졸업하였다. 그가 문단에 등단한 시점이 1936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창고보시절에 이미 『동아일보』에 글을 실었다. 1932년 8월 19일자 『동아일보』에 기재된 「탐승수점(探勝數點)-기일」, 「탐승수점-기이」라는 글에 본명이 밝혀져 있다. 브나로드운동으로 고향 화순에서 강습회를 마치고 주변의 경치를 둘러본 이야기이다. 1933년『매일신보』에 「추우」, 『조선일보』에 「포구의 노파」라는 시를 발표한다. 이후 1938년 『매일신보』가 학생문예란을 개설하면서 그의 활동무대가 넓어진다. 여러 대학의 캠퍼스를 소개하는 학원풍경 특집란에 「검푸른 송림 속 청춘의 향연장-연전편」이라는 글도 발표했다. 연희전문 재학 중에 산문시 「새벽」, 「좀 먹은 단층」 등도 발표하였다.
이렇듯 학생문사로서의 그의 입지를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성도 있다. 김승구는 그의 작품 발표무대로 봐서 고창고보 동창인 서정주와 함께 『시인부락』 창간한 시점을 등단으로 간주하는 것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문학활동은 『시인부락』을 통해 1942년 일제말기까지 이뤄진다. 등단작으로 알려진 작품은 「장(腸)」, 「호텔 앞 광장」, 「법원과 가마귀」, 「호흡」, 「종로168호」 등으로 민중의 가난한 삶을 잘 보여준다. 『시인부락』을 기준으로 아방가르드적인 기법을 시에 도입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시에 바탕에는 민중성이 놓여 있었다.
해방기에 출간된 시집 『칠면조』(1947)는 4부로 구성되어 있고 대체로 일제 식민지의 삶을 시적 주제로 들여놓고 있다. 민족주의 내용과 모더니즘취향의 시적 기법을 동시에 담은 시세계를 보여준다. 「추조(追弔), 꼬르키-옹(翁)」은 막심고리키 죽음을 추모하는 작품으로 고리키는 그의 문학세계에 영향을 준 인물로 짐작된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 그의 시 「공작」(『국민문학』1942.3), 「백화의 서정」(『조광』1942.8)이 포함되어 있다. 최라영은 두 작품을 친일문학으로 보기 어렵다고 보면서 1939∼1945년까지 여상현의 문학활동이 부재한다는 해방 이후 발표작 「복로방(福爐房)」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작품은 정치현실을 비판하면서 민중의 생활에 집중해 있다. 1947년 「슬픈 가락」(『백민』)을 발표하였다. 1950년 서울 성동구에서 납북되었으며, 2017년 4월 27일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 제4조에 의거하여 납북자로 결정되었다.
여상현의 문학은 해방기 시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논의된다.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서기로 활동하였으며 민중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변혁 의지를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