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550년(진흥왕 11) 고구려군과 백제군을 축출하고 한강 유역을 독점하며 독자적인 대중국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이후 한강 유역을 상실한 고구려나 배반당한 백제로부터 군사적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백제를 견제해줄 우호국의 확보가 절실해져서, 대중국 외교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특히 북중국의 수(隋)가 589년 중국 대륙을 통일한 이후 594년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을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冊封)하며 우호를 도모하였다. 신라도 수나라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의 유지를 위해 누차 사신단을 파견했다.
603년(진평왕 25)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침략하자 진평왕이 직접 1만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 막아 싸웠다. 그리고 이듬해인 604년(진평왕 26) 7월 신라는 대나마(大奈麻) 혜문(惠文)과 만세(萬世) 등을 수에 입조(入朝)케 하였다.
혜문이 견수사(遣隋使)로 파견된 시점은 고구려의 대대적인 신라 침략 직후였다. 4년 후인 608년(진평왕 30) 진평왕이 원광(圓光)에게 수에 보낼 걸사표(乞師表) 작성을 요청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 혜문의 사행 목적은 고구려의 신라 침략을 수에 알리고 이에 대한 외교적 차원의 압박을 도모한 것으로 여겨진다. 혜문의 관등이 대나마인 것으로 보아 왕경인(王京人) 출신이라는 점은 확실하나 이외에 구체적인 생애나 활동상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