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알 수 없으나 왕경인(王京人)으로 보인다. 조주(助州)는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에서 외교관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668년(문무왕 8) 7월 16일 한성주(漢城州)에서 문무왕의 명을 받은 문영(文潁) 등이 신라군을 통솔하고 북진해 사천원(蛇川原)에서 고구려병을 격파한 다음 9월 21일 당의 대군과 합세해 평양성(平壤城)을 직공하였다. 궁지에 몰린 고구려 보장왕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3자 연남산(淵男産)을 보내 당나라 장수 영공(英公) 이적(李勣)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보장왕과 왕자 고복남(高福男), 고덕남(高德男)과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 당시 신라는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大阿飡) 조주를 호송사(護送使)로 삼아 이적을 따라 당나라에 가게 하였다.
호송사로 당에 들어간 조주가 대아찬이라는 관등(官等)을 소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 다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진골(眞骨)로서 높은 서열의 소지자임에는 분명하다. 이때 입당한 김인문은 당에 잔류하여 신라와 당나라 양국 외교에 관여한 행적이 전하지만 조주에 대한 추가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