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때 전라도 유달산 노적봉에 얽힌 전승설화를 근거로 오늘날 새롭게 구성한 놀이이다. 이 놀이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지금의 유달산 입구 바위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군량미를 쌓아놓은 노적으로 위장해서 이곳에 많은 군사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왜적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매년 이 고장에서 펼쳐지던 민속놀이의 하나이다.
임진년(壬辰年, 1592) 왜군이 전쟁을 일으킨 이후, 화의교섭 결렬로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켜 조선을 침입하자,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큰 승리를 거두고 목포를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는다. 목포의 유달산 노적봉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전승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이 전승설화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노적봉을 이엉으로 덮어 곡식을 많이 쌓아둔 것처럼 위장하거나 아녀자들이 강강술래를 함으로써 병사들의 군사훈련인 것처럼 속이고, 영산강에 회가루를 풀어 많은 군사들이 밥을 지어먹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고 한다.
지역주민들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이 고하도(高下島)에 머물면서 병력과 군량미를 확보한 후 완도(莞島), 고금도(古今島)로 진지(陣地)을 옮긴 후 노적놀이가 성행한 것으로 전한다. 이처럼 유달산노적놀이는 풍요를 기원하거나 주민들의 단결을 염원하고 호국적인 성격을 간직한 채 전승되어온 민속놀이이다.
노적놀이는 가을 벼 베기가 끝난 후 이루어지는데, 세 단계로 연행된다. 첫째는 마을풍물패가 길놀이와 판굿 등을 연행하는 풍물놀이, 둘째는 마을여성들 중심의 강강술래, 셋째는 건장한 남성들로 행해지는 노적쌓기 등이 그것이다.
첫째 마당 길놀이에서는 모든 꽹과리, 장고, 북, 징을 든 연주자들과 소고나 소도구를 갖고 등장하는 잡색 등의 출연진이 춤을 추면서 등장한다. 풍물패의 판굿은 이채와 삼채장단을 주로 사용하고, 진오방진이나 사채 등의 가락도 연주하면서 진놀이를 펼친다.
둘째 마당 강강술래에서는 마을의 여성들이 길게 줄을 지어 늦은 강강술래, 중강강술래, 잦은 강강술래, 남생아 놀아라, 청어엮기, 덕석풀기, 꼬리따기, 지와밟기 등의 순서에 따라 연행한다.
셋째 마당 노적쌓기는 이 놀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남성들이 중심이 되어 노적을 만들어 큰 산처럼 쌓는다. 노적은 곡식 나락을 쌓아 보관하려는 목적이므로 곡식알이 붙은 뿌리쪽을 안쪽으로 쌓는데, 노적을 보호하기 위해서 삿갓 모양으로 만든 덮개를 씌운다.
노적쌓기가 끝나면, 마을풍물패의 판굿과 함께 모든 일꾼들이 모두 나와 춤을 추면서 행사를 끝마친다.
노적(露積)은 농촌의 마당이나 공터에 원통형으로 쌓아둔 곡식더미를 뜻하는데, 노적봉은 마치 ‘곡식더미와 같은 봉우리’라는 의미를 지닌다. 노적놀이는 조선의 군대와 식량의 충분함을 과시하여 왜군을 속이고, 더불어 백성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고안된 놀이이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을 간직한 채 전승된 설화 안에 농촌의 전형적인 문화적 양식이 반영된 놀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