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청룡사 석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서울 )

서울 청룡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서울 청룡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조각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룡사 명부전에 있는 조선후기 승일이 수조각승으로 제작한 석조불상 및 시왕상 등의 불교조각상. 보물.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룡사 명부전에 있는 조선후기 승일이 수조각승으로 제작한 석조불상 및 시왕상 등의 불교조각상. 보물.
개설

201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주불석으로 조성된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 등 총 22구의 조각상이다. 시왕상 중 제1 진광대왕 복장에서 출토된 조성기(造成記)에 의하면, 1660년(현종 1)에 지금의 경산 동학산 용밀사(龍蜜寺)에서 상화원(上畵員) 승일(勝一, 1629∼1670), 변수(邊手), 성조(性照, 1646∼1670) 및 증명 원응(圓應) 등이 참여하여 제작하였다. 2009년 3월 5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에 3월 11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이 조각상들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대구 보현사에 이안되어 전해지다가 1950년대에 지금의 청룡사로 옮겨오게 되었다.

내용

지장삼존상을 중심으로 제1에서 제10왕까지를 좌우로 번갈아 5구씩 봉안하였고, 그 사이에 동자·동녀를 안치하였는데, 이중 1구만 원래의 것이고 나머지 9구는 1959년에 새로 제작한 것이다. 시왕단 양 옆으로는 사자, 판관, 인왕을 안에서부터 차례로 세워두었는데, 판관상도 1959년에 새로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명부전의 본존인 지장보살상은 높이 92.5㎝의 석조상으로 민머리이고 신체에는 장엄을 걸치지 않은 승려형이다. 얼굴은 신체에 비해 크고 둥글며, 통견에 오른쪽 어깨를 별도의 가사가 덮고 있는 착의법을 보인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에 왼손에 약함을 든 형식이다. 이러한 모습은 승일이 제작한 또 다른 지장보살상인 송림사 석조지장보살좌상(1665년)과 수인은 다르지만 양식적으로는 유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지장보살을 협시하고 있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높이 1m 내외의 입상으로 모두 합장한 자세이며, 도명존자는 녹색 가사와 붉은 대의를 두른 형식이고, 무독귀왕은 원류관과 붉은 곤룡포를 착용한 제왕의 모습이다.

시왕상은 모두 90㎝ 내외의 작은 편에 속하는 조각상인데, 대체로 석조각의 특성상 옷 주름 등은 간략하게 처리하고 대신 둥그런 괴체감이 강조된 양식이다. 모두 원류관을 착용하고 있으나 제5 염라대왕은 그 위에 경책을 얹고 있다. 시왕이 앉아있는 의자는 등받이 위에 양쪽으로 용머리가 장식되었고, 팔걸이에는 봉황이 장식되었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있는데, 이 중 제10 오도전륜대왕은 반가좌를 취하고 있다. 양손으로는 홀을 쥐고 있지만, 제2 초강대왕과 제3 송제대왕은 각각 판결문을 쓰고 있거나 읽고 있는 자세이고, 제4 오관대왕은 홀을 오른손으로 잡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 오도전륜대왕은 홀이 없이 반가한 발의 발목과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자세이다. 이들 시왕상들은 크기는 작지만 단단하고 정적인 조형성을 통해 재판에 임한 시왕들의 단호함과 엄격함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하였으며, 아울러 공명정대하고 온화한 느낌도 들게 한다.

시왕보다 작게 제작된 입상의 귀왕들은 그 생김새가 시왕과 유사하다. 그러나 귀왕, 판관, 사자 순으로 점점 머리와 신체의 비례에 있어 머리가 커지고 있는데, 이는 이들 세 종류 존상의 높이를 85㎝ 내외로 비슷하게 유지하면서도 이러한 비례를 통해 위계관계를 명확히 드러내려고 의도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사자들은 짧은 하체임에도 몸의 체중을 한쪽에 실어 비스듬하게 서있는 모습을 적절하게 잘 표현했는데,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두루마리 문서를 한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로서의 명을 수행하면서도 죽은 영혼에 연민을 느끼고 기다려주는 듯 연극적 효과까지 엿보인다.

시왕상들 사이에 위치한 동녀·동자는 대부분 새로 만들어 넣은 것이지만, 전통적인 양식을 계승한 동자상들과 달리 동녀상들은 한복을 착용하고 있는 상도 있다. 명부전 도상에 이러한 동녀상이 왜 삽입되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원래부터 있었는지, 아니면 1959년에 새롭게 창안된 것인지부터 밝혀져야 할 것이다.

금강역사는 상체와 하체를 많이 드러내어 고전적인 금강역사의 모습을 많이 계승하고 있으며, 금강저 없이 맨손으로 아래막기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머리가 크고 몸은 작아서 해학적인 느낌을 줄 듯하지만, 얼굴 표정과 세부 묘사는 매우 진지하여 근엄함이 느껴진다.

특징

수화승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조각승 승일은 수화승 현진(玄眞)과 창녕 관룡사 목조삼세불좌상(1629년)과 성주 명적암 목조아미타불좌상(1637년)을, 수화승 무염(無染)과 영광 불갑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1635년)을, 그리고 수화승 청헌(淸憲)과 하동 쌍계사 목조삼세불좌상을 제작하였다. 이후 그는 수화승으로서 천은사 수도암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대세지보살좌상(1646년), 정수사 목조삼세불좌상(1648년), 봉은사 대웅전 협시불좌상(1651), 북고사 목조아미타불좌상(1657년) 등을 제작하였다.

청룡사 명부전 상을 제작한 뒤에는 송림사 명부전 석조삼장보살좌상과 시왕상(1665년), 고방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1670년) 등을 제작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현진의 제자로 생각되지만, 현진과 함께 활동을 했던 동시기 조각승인 무염·청헌과도 함께 작업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은 그의 예술성을 더 높여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승일은 천은사, 정수사, 봉은사, 송림사, 고방사 불사에 성조와 함께 참여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조각 이력에 있어서 청룡사 불상은 목조각을 주로 하던 이들이 경주 불석의 조각적 특성을 발견하고 작은 크기이지만 무게감 있는 조형성을 지닌 석조각 기법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재료의 변화와 함께 불·보살상을 주로 조각하던 승일 일파가 명부전의 도상 일괄을 다루게 되었다는 것도 주목할 현상이다. 이러한 조선 후기의 변화상은 한국 조각사에 있어서 근대성의 형성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청룡사 명부전의 조각상들이다.

의의와 평가

청룡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은 정확한 조성시기, 불사에 참여한 조각승, 그리고 시주자 등 당시의 불사를 종합적으로 고찰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작품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청룡사: 청룡사의 역사와 문화』(문명대, 한국미술사연구소, 2010)
「청룡사 명부전 석지장시왕상 연구」(문명대,『강좌미술사』34, 한국미술사연구소, 2010)
문화재청(www.cha.go.kr)
집필자
주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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