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높이 39.7㎝인 중소형 보살상으로, 원래 범어사에 보관되었다가 여여정사가 개창되면서 옮긴 것이다. 보살상은 균열이나 파손 없이 양호한 상태이며, 보관은 새로 제작하여 착용한 것이다. 보살상에서는 황동의 후령통(候鈴筒)과 이를 싼 황초폭자(黃稍幅子), 조성발원문, 주서다라니, 경전 등이 발견되었다.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적조암(寂照庵)에 봉안하기 위해 1722년(경종 2)에 조각승이 진열이 제작한 것이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허리를 세우고, 머리를 앞으로 숙인 자세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양손은 다리 위로 살짝 들어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다. 작은 보살상이지만 머리가 큰 조선 후기 불상의 일반적 특징을 잘 따르고 있으며, 어깨와 적당한 다리 폭의 신체비례가 안정감을 준다. 턱이 수평을 이루는 방형의 얼굴은 눈과 코가 작은 편으로 나지막하게 조각되었으며, 입가의 희미한 미소는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다시 오른쪽 어깨를 살짝 대의를 걸쳐 입은 모습이며, 오른쪽 어깨의 대의는 가장 안쪽 옷 주름 하나가 깃처럼 강조되었다. 배 앞으로는 오른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내의 자락과 왼쪽의 대의 자락이 서로 대칭을 이루며, 가슴 아래에 입은 수평의 승각기는 가운데가 띠처럼 도드라져 올라와 있는데 1661년(현종 2) 부산 범어사 대웅전 불상의 승각기에도 같은 특징을 볼 수 있다. 양 다리 사이에는 오른 편으로 가지런히 펼쳐 놓은 4개의 옷 주름이 있으며, 왼쪽 무릎 위에는 넓적한 소맷자락이 흘러내려 있는데, 1713년(숙종 39)에 진열이 제작한 경기도 고양 상운사 불상과 닮았다.
보살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는 이 상이 적조암(寂照庵)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된 관음보살상이고, 1722년(경종 2)에 진열이 조성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 외에도 경제권을 도모하는 화주(化主), 불사가 있을 때 부처인 앞에 음식을 차리는 일이나 취사 감독, 의자나 침구 등의 소임을 맡은 별좌(別座) 등의 인물들이 기재되었다. 이들은 1722년(경종 2) 범어사 불사에 참여한 인물들과 동일한데. 이러한 사실이 『범어 사지(梵魚寺誌)』에 보인다. 따라서 적조암은 범어사의 한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1722년(경종 2) 범어사에서 대대적인 불사가 이루어졌음은 물론 관음보살상도 이때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여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제작한 진열은 곡성 서산사 목조관음보살좌상(1706), 함양 도솔암 목조관음보살좌상(1707), 고양 상운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1713), 양산 통도사 목조사천왕사(1718), 화순 만연사 목조아미타불좌상(1720) 등이다. 남아 있는 작품으로 보아 그의 활동 범위가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적으로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조성한 불상은 하반신의 옷자락 처리가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곡성 서산사 불상과 함양 도솔암 불상은 다리 사이의 가운데 옷 주름과 왼쪽 무릎 위의 옷 주름의 끝이 S자형을 이루고 있고, 도솔암 불상은 옷자락이 대좌를 덮은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밀양 영여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진열의 불상조각 특징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발원문과 사적기를 통해서 당시 불사의 규모과 운영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