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은 조선 인조 때 정치가이며 문장가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1642년(인조 18) 그의 나이 54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해남 금쇄동과 수정동의 첩첩산중에 머물면서 자연 속에 인공적인 조형공간으로 원림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들 유적은 그 터를 남기고 있으며, 이곳에서 윤선도가 쓴 『금쇄동기(金鎖洞記)』(보물, 1968년 지정),『산중신곡(山中新曲)』,『오우가(五友歌)』 등의 작품은 해남 녹우당 유물수장고에 보존되고 있다.
윤선도는 한성에서 살았으나 당시의 당쟁에 몰려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와 녹우당에 거주하면서 완도 보길도와 금쇄동 등지를 왕래하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런 은둔 생활 중에 윤선도는 세연정(洗然亭), 낙서재(樂書齋), 동천석실(洞天石室) 등을 지었고, 이곳 금쇄동과 수정동에서는 자연경승을 모태로 하여 원림을 조영하였다. 보길도에는 1748년 윤위가 만든 『보길도지(甫吉島識)』가 있어 그 내력을 알 수 있으며, 금쇄동에는 윤선도가 직접 쓴 『금쇄동기』가 있어 그의 문학세계를 알 수 있다.
윤선도는 1671년(현종 12) 완도 보길도 낙서재에서 85세로 사망하여 금쇄동 산 중 묘소에 안장되었다. 묘에는 허목이 지은 신도비와 제각인 추원당이 갖추어져 있다. 해남 윤선도 유적은 금쇄동원림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남읍에서 약 8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해발 270m의 산 정상에 있다. 해남 녹우당에서 멀리 바라보이며, 산 정상에서도 아스라이 덕음산 밑에 자리한 녹우당이 보인다.
이 유적은 금쇄동과 수정동으로 나뉘어지는데 현산면 구시리 진입도로에서 서북쪽으로 2.5km 거리의 산 정상이 금쇄동이고, 수정동은 금쇄동으로 오르는 길 입구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금쇄동은 15만 평방미터의 넓은 면적으로 이 일대에 현산고성(懸山固城)이 있다. 현산고성은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문지, 수구의 성곽시설과 망루지, 건물지, 제방 등의 성내시설이 남아 있다.
금쇄동이란 명칭은 윤선도가 금쇄석궤(金鎖石櫃 : 황금의 자물쇠로 잠긴 궤)를 얻는 꿈을 꾸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꿈과 부합되는 이곳을 찾아서 그 이름을 금쇄동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는 진입로에서 금쇄동으로 오르는 산에 길이 나있지 않고 나무와 바위틈 사이로 오르면서 명소 22곳에 이름을 붙이고, 명칭의 연유를 『금쇄동기』에 서술하였는데,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그 장소에서 떠오른 상념, 선영에 대한 추모, 마음의 안정과 은둔 등을 표현하였다.
이곳은 고산 윤선도의 시문학 창작의 산실로서 국문학상의 학술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옛 성이 잘 남아 있어 문화유산의 가치가 매우 큰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