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 9일 북한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사망으로 조문단 파견의 적절성을 둘러싸고 한국 내 벌어진 논쟁이다. 당시 남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결정하고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그의 조문 여부를 둘러싸고 한국사회 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정상회담을 준비 중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여 조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조문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탈퇴를 선언하면서 북핵 위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94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였으나, 북한 핵 문제로 인해 남북한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특히 북한은 서울 ‘불바다’ 등의 발언으로 남한을 자극하였고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조성되었다.
당시 북핵 위기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진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 악화를 우려하여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94년 6월 카터(Jimmy Carter) 전 대통령을 방북시켰고, 이 사건은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카터는 김일성과의 회견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얻어냈고, 6월 20일 공식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였다. 6월 28일 남북한은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개최하여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7월 9일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알려지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고 그의 조문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다.
김일성 사망 이후 남한 내에서는 김일성에 대한 호칭을 둘러싼 논란이 먼저 발생하였다. 이전까지 호칭 없이 ‘김일성’으로 통칭하였으나, 남북실무접촉이 진행되자 ‘김일성 주석’으로 호칭이 변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의 사망 이후 김일성에 대한 호칭 문제가 제기되어 다시 ‘김일성’으로 변화되었다.
이후 일부 야당 의원들이 조문단 파견을 제의하였으나, 국내에서 부정적 여론이 팽배해지자 조문은 무산되었다. 7월 14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남한 조문단을 환영한다는 대변인 담화를 발표하였으나, 조문 반대 여론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에 당시 우리 정부는 김일성 사망 직후 긴급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전군과 경찰에 비상 경계령을 내렸으며, 조문에 대한 어떠한 발언도 모두 김일성 추종세력으로 규정하고 조의 표명과 조문 행위에 대해 사법처리 방침을 분명히 했다. 비록 그가 정상회담의 한 당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조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자, 분단 이후 계속된 무력도발로 한국 사회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야기한 장본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야당이 남북관계 개선과 민족화해 차원에서 조문단 파견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일부 재야단체들이 정부의 입장에 반대하여 조문단 파견 의사를 밝히면서 조문의 찬반 및 가부를 두고 극심한 갈등이 진행되었다.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과정을 순탄하게 진행하고 있던 상황에서 남한의 당국자가 조의를 표하고 조문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조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7월 18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14개 대학 총장들의 오찬간담회에서 서강대학교 박홍 총장이 조문 주장에 대해 ‘김정일 주사파 배후설’을 제기하였다. 이어서 7월 19일 국가안전기획부가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인 조명철의 귀순을 공식 발표하였고, 외무부는 한국전쟁이 김일성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소련의 각종 문서들을 공개하였다.
북한은 『로동신문』 논평을 통해 “남조선 당국이 조문단 파견을 가로막고 조전·조의는 고사하고 애도의 뜻조차 표시하지 않은 것은 상식 이하의 불손하고 무례한 행위”라며 비난했으며, 남북관계는 일체의 접촉이 끊어진 채 다시 냉랭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또한 북한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대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북핵 위기 해결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산되었고, 김일성을 이어 등장한 김정일 체제의 불안정성을 부각시키면서 남한 내 ‘북한붕괴론’이 설득력 있게 주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