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중심의 군부세력은 처음에는 행정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행정적 민주주의는 인도네시아 수카르노가 주장한 교도 민주주의, 파키스탄 아유브 칸이 내세운 기본 민주주의와 유사한 것으로 서구 민주주의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여 권력의 지도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행정적 민주주의가 다양한 비판에 직면하자 1963년부터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1963년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새로운 슬로건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숱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민족적 민주주의의 내용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제시하지는 못했고, 다만 윤보선을 수구 사대세력으로 비판하면서 자신들을 민족주의 세력으로 강조하였다.
민족적 민주주의가 처음에 누구에 의해 제시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황용주는 자신이 박정희에게 제안하여 채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공인된 내용은 아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이미 그전부터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일민주의를 강조했던 안호상이나 ‘민족지상 국가지상’이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민족청년단의 이범석도 종종 사용한 용어였다. 더 멀리는 소련의 스탈린도 식민지·반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민족 민주주의 혁명을 강조했었다.
박정희 체제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가 어느 흐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서구 자유 민주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자 했음은 분명했다. 즉 한국의 특수한 현실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민주주의를 내용적으로 제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1963년 대선 국면 이후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고 1970년대 들어 한국적 민주주의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