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동백림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였고 윤이상을 비롯하여 저명한 문화예술인 및 지식인들을 관련 혐의로 구속하였다. 이어 7월 11일에는 2차 수사발표를 통해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가 동백림 간첩단의 공작부서로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다.
민비연은 1963년 10월 서울대 사회학과 황성모(黃性模) 교수를 지도교수로 하여 발족한 학생 서클로 제3세계 민족주의 비교연구를 표방하였다. 참여 학생들은 김중태·박범진·현승일·김도현·이종율·박지동 등이었는데, 이들은 1964년의 6·3사태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민비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공안기관의 요시찰 조직이었고 1964년에는 회원 상당수가 제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했었다. 김중태는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권의 핵심 멤버였으며 한일회담 반대투쟁인 6·3사태 등 주요 시위의 배후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민비연이 황성모를 지도교수로 내세운 이유는 그가 공화당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 때부터 공화당에 관여하고 있었음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즉 당국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피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황성모는 김종필과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건 이후에도 국립대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럼에도 중앙정보부는 관련학생은 물론 황성모 교수까지 반국가단체 가입 및 제3공화국 타도를 기도한 혐의로 구속기소 하였다.
중앙정보부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민비연은 한일회담 반대투쟁 배후조종,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불법 가두시위를 주도함으로써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황성모 교수의 행적이나 민비연 회장을 역임한 이종률이 유정회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것에 비추어 사건의 실체와 관련자들의 혐의내용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1969년 대법원까지 가는 재판을 통해 사건 관련자 7명 중 황성모 교수와 김중태는 징역 2년, 현승일은 1년 6개월의 실형을 언도받아 만기 복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