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진보당 사건 이후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반공산주의적 정치지형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을 펼 수 없었던 혁신세력들은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부가 붕괴하고 이와 함께 정치지형의 개방성이 확장되자 먼저 정당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들은 제2공화국 하에서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는 1960년 7월 29일 총선에 임하였는데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 등으로 나뉘어 참여하였다. 그 결과는 민의원 총 233석 중에서 6석, 참의원 총 58석 중에서 4석을 얻은 것이었다.
선거 후에 그들은 다시 이합 집산하여 통일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사회당 등으로 배열되었다. 이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좌익적 경향을 지녔던 그룹은 사회운동 및 학생운동 내의 유사 계열과 연대하여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 2대악법 반대투쟁, 통일을 위한 조속한 남북협상의 추진 등을 시도하였다. 조직으로 보면 민족자주통일협의회와 중립화통일총연맹 등이 그러한 연대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후 혁신세력들 전반은 정치활동을 금지당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형 처분과 수형 생활을 당해야 했다.
혁신세력들은 사실 그 내적으로 이념적 편차가 있었다. 흔히 ‘진보’로 분류되는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인물들은 물론이고, 해방 직후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한 경력을 가진 우익진영의 인물들, 반자유당·비민주당계 보수파 인물들까지 포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공통된 정치적 비전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였고, 대중적 기반이 취약한 명망가 중심의 세력들이었다. 그럼에도 대체로 우익독재와 좌익독재(현실의 사회주의)를 동시에 반대하며 민주복지사회의 지향을 공언하고 있었고, 당면한 한국사회의 문제적 상황을 해결하는 길로 민족자주적인 평화통일이 급선무라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