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2월 9일 충청남도 대덕군 기성면 산직리에서 태어났다. 1944년 경성사범학교 보통과를 졸업하였고, 194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장항읍 소재 장항여중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생활을 하다가 1951년 1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김종필 중위의 도움을 받아 대구시에 도달하여 미8군연락장교단의 초병으로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 김종필 중위의 안내로 역시 육군정보국에서 근무하였던 박정희 중령의 집(삼덕동 소재)에서 자취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과 당시 나누었던 세 사람의 공감대는 그들이 이후 5·16군사정변을 함께 감행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51년 3월부터 정전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전방 보병 제6사단에 파견되어 군생활을 지속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사단법인 충무공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5년간 재임하였고, 1961년 5월 16일 민간인 신분으로 군사정변에 참여하였다. 군사정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 자금의 모집과 이른바 혁명포고문을 인쇄 · 배포하는 작업을 하였고, 군정이 수립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경제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김종필을 비롯한 민주공화당 창당 작업 주체의 일원으로서 1960년대에 걸쳐 집권 민주공화당의 주류, 김종필계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가운데 영향력 있는 정치인 생활을 하였다. 1960년대에만 제6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대덕 · 연기), 민주공화당 초대 원내총무, 제7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대덕 · 연기)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65년경부터 심화되어간 주류와 비주류 간의 갈등, 이것의 구체적 사태였던 삼선개헌의 추진과 이에 대한 저항이라는 당 내부의 정세 속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김종필계의 일인으로서 삼선개헌에 반대하고 분파 · 해당행위를 한다는 이유에서 1965년과 1966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당으로부터 권리 정지 처분을 당하였으며, 특히 1968년 5월 국민복지연구회사건과 관련해서는 당에서 제명 조치까지 받았다.
그렇지만 결국 박정희 대통령에게 설득되어 1969년 9월 14일 행해진 국회 삼선개헌안에 찬성을 하였고, 1970년대에는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으로서 별다른 파고를 겪지 않는 정치인 생활을 영위하였다. 제8대(대전을), 제9대(대전), 제10대(대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78년에는 정무담당 제1무임소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 혐의를 받아 정치규제를 당하면서 정계를 떠났다. 1985년 이후 사단법인 동서문화교류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해외문화교류사업을 하였다. 1987년 김종필이 주도한 신민주공화당 창당에 동참하여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것이 마지막 정치활동이었다. 2005년 4월 2일 79세에 숙환인 뇌혈관 질환으로 사망하였다.
2등 근무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