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민주화운동은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하고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내려온 직후 시작되어 같은 해 말까지 전국적 현상으로 지속되었다. 전체의 절반가량에 이르는 대학에서 일어났을 정도로 상당히 큰 흐름을 이루었다.
먼저 학도호국단 간부들의 배척과 새로운 자치학생회의 결성을 그 하나의 내용으로 들 수 있다. 자치학생회 건설의 중요한 방향은 임원선거를 직선제로 바꾸고 대의원회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 구성된 자치학생회들 중에는 기존 학도호국단 구성원이 계속해서 임원직을 점유하는 사례들이 많았다. 또 서울 학생들과 지방 학생들, 종합대학교 학생들과 단과대학 학생들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대한민국대학생총연합회와 대한민국학생자치연합회, 대한민국학생연합회 등 연합조직의 분립을 초래하였다.
어용교수와 무능교수의 축출활동은 서울대, 단국대, 경북대, 연세대, 동국대 등 여러 학교에서 극심한 갈등을 동반하며 진행됐다. 그 대상자들은 과거 이승만 정부와의 관계, 자격미달의 요건 등과 결부되어 있기도 하였지만 학교운영의 비민주성, 불합리성 등과 결부되어 있기도 하였다. 따라서 학원경영 상태의 전반적인 민주화 내지 개혁, 그리고 그 담당자들의 교체운동과 연동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총장과 재단이사장의 겸임, 임원진의 족벌체제화 등이었다.
4·19혁명기에 조성된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학원민주화운동은 일정한 성과물을 낳았음에도 비합리적인 폭력사태를 동반하였고, 그 성과물이 임시방편적인 수습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국민생활계몽운동과 결합하기도 하였는데, 1961년 크게 가시화된 급진적 민족주의의 흐름과는 선을 달리하는 강한 반공산주의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