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통 사건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정경모는 1979년 도쿄(東京) 시부야(渋谷)에 사숙 ‘씨알의 힘’을 개설했다. 이를 근거지로 다채로운 언론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씨알의 힘」을 발행했다.
1980년대 초 한국정부에 의해 『창작과비평』, 『씨알의소리』 등이 폐간을 당했다. 「씨알의힘」은 본국의 지식인에게 발언의 기회를 부여하고, 한국문제를 단지 정치 슬로건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원근감각’에서 접근해 일본의 현재와 미래에 연결시켜 보려는 취지에서 일본어로 발행되었다. 정경모는 특정인물의 주의에 편승하지 않고, 분단 상황의 제약을 벗어나 ‘조선민족의 일원으로서만 발언’하겠다는 원칙을 발간사에서 밝히고 있다.
1981년 5월에 창간되어 1987년 10월까지 부정기적으로 총9호가 발행되었다. 이후 1991년 7월부터 「粒(씨알)」로 이름을 바꾸어 2004년 8월까지 42호가 발간되었다.
정경모는 창간호에 쓴 ‘시대의 과제로서의 조선반도’를 시작으로 매호 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3호에는 ‘씨알의 의미와 민중운동’이라는 주제로 함석헌, 서남동, 한완상, 안병무가 참가한 좌담회가 실렸다. 가지무라 히데키와 와다 하루키의 ‘왜 조선현대사인가’라는 글을 비롯해 다수의 일본인 필자의 글도 실렸다. 황석영의 소설 ‘한씨연대기’도 3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송기숙, 현기영의 소설도 번역되어 게재되었다. 특히 1983년 6월에 발행된 제6호는 여운형·김구·장준하 세 선각자의 ‘운상경륜문답’이 정경모의 글로 실렸는데, 이는 당시 한국에서 「찢겨진 산하」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번역·출간되어 반향을 일으켰다. 종간호인 9호에도 여운형의 탄생 100주년에 관한 몇 편의 특별기고문이 게재되었다.
아직 출현하지 않은 ‘미래의 조국’에 대한 ‘충성’을 통해 무엇이 진정으로 ‘민족’을 위하는 것인가를 모색하겠다는 발간 취지가 잡지에 어떻게 살아있는지, 그 평가는 아직 용이하지 않다. 「씨알의힘」이 발행된 시기의 한국 정세는 민주화투쟁이 가열되었고, 그 열기에 「씨알의힘」도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국내의 막힌 숨통을 다소나마 터주는 역할도 했다.